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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계엄이 왜 내란인지 모르는 기독교인

민주시민이 되기 전 집사와 장로가 된 이들이여

by 쏭마담


그렇다면 더욱 의문이 들 것이다. 우리 교회는 과거에 목사의 비리에 목소리를 내 본 사람들이 모인 반골 기질 다분한 교인들이 모인 교회다. 정의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고 비리에 눈감지 않는다. 교회 안에 공의를 세우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경험이 있다. 그렇다면 전시도 사변도, 국가비상시국도 아닌 이때. 국민을 대상으로 계엄을 선포한 이 황당무계한 전 대통령과 정권에 대해 일제히 한 목소리를 낼 법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우리는 계엄이 내란이 되고 공범자들이 하나씩 법정에 소환되는 동안 교회에서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쉽게 말하면, 우리가 명절에 부모님과 만나 오손도손 정치에 대한 얘기를 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우리 사이엔 '성령의 줄로도 하나 되게 할 수 없는' 강력한 세대 차이가 존재한다. 전쟁 경험의 유무로 이분하는 남북 분단의 트라우마, 영호남 지역감정과 보수와 진보로 이분하는 좌우 편향, 가부장의 깊은 뿌리에서 시작되어 최근 역차별 논의로 촉발된 남녀 갈라치기 등. 우리가 지난 70년간 경제적 풍요를 얻기 위해 모두 뒷전으로 미뤄 둔 이념 간, 세대 간, 남녀 간 가치와 정의와 공정과 소통의 문제.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한 경험 자체가 부재하다. 그 대가를 우리는 이제야 극렬하게 치르고 있으며,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정치란 건 거창한 게 아니다. 서로의 옳고 그름을 공공의 장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만 해도 어렸을 때 집안에서 정치에 대해 이야기 나눠본 기억 자체가 없다. 우리 집은 가부장적인 중산층 보통의 가정이다 보니 식탁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강남에서 비교적 풍요롭게 자란 환경적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당연히 없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정치적 편향을 심어줄 수 있는 어떤 발언도 금지당했다. 학교는 군사독재의 그늘과 민주화 운동이라는 수혜 속에서 옳고 그름을 자유롭게 논하기보다 한 학생이라도 더 인서울 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왔다. 교회라고 다를 바 없었다. 정교분리라는 미명하에 전도하고 부흥하고 세를 늘리느라 바빴다. 김누리 교수의 표현대로 우리는 제도적으로는 민주화를 이루었는지 몰라도 의식 구조는 여전히 지난 70년 동안 능력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두는 파시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엔 폐허 위에서 먹고사는 일로 바빠서 정의를 논하지 못했고, 먹고사는 일이 다 해결되었을 때는 풍요에 취해 굳이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기 싫어하게 되었다. 유시민 작가가 말한 '후불제 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제헌헌법 덕택에 우리 국민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얻었다. 양성평등이 대중적 의제가 되기도 전에 여성들이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받았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노동 3권이 주어졌다. 대한민국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지사들의 희생과 헌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60여 년 동안 꾸준히 그 비용을 후불했다. 1960년대 4.19 혁명의 용감한 형님과 언니들이, 1980년 5.18 당시 전남도청의 시민군 전사들이, 1987년 6월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를 뒤덮었던 익명의 시민들이 엄청난 수고와 희생을 치렀다.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식인과 언론인, 노동조합 지도자와 대학생들, 종교인과 정치인, 농민과 회사원들이 체포와 구금, 해고와 고문의 위협을 무릅쓰고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분투했다. 이 모두가 민주공화국에 들어가는 비용을 후불한, 위대한 시민 행동이었다. 24p


나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도 4.19와 5.18 현장에서 독재와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치 않았다.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굳이 체포와 구금과 해고를 무릅쓰고 민주주의를 이룰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내 주변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만연해 있었고, 교회 또한 늘 세상과 어느 정도 동떨어진 채 개인 구원과 전도의 문제에 열중했다. 그러니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이 비리부패주술 의혹에 휩싸인 자기 아내를 비호하고자 계엄을 선포했을 때. 나는 계엄이 뭔지 잘 몰랐다. 그게 왜 내란인지 몰랐다. 나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었다. 희생을 치른 이웃이나 어른을 가까운 주변에서 본 적이 없었다. 교과서에서 국민 주권이란 개념을 말로만 배웠지, 우매한 지도자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걸 보면서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아서 어떻게 맞서서 싸워야 하는지 몰랐다. 민주주의의 달콤한 열매는 마음껏 누리면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 몰랐다. 늘 무임승차 하면서 나는 부끄러운 줄 몰랐다. 민주주의를 배우기 전 우리는 집사와 장로가 되고, 정의를 배우기 전에 가르치기부터 시작했다. 교회도 세상과 똑같았다.


한마디로, 계엄이 일어나도 내가 잡혀갈 일은 없게 살았기에, 나는 계엄이 일어나도 그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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