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파면은 어머니 시대에 대한 자기부정
아들이 사춘기를 극렬하게 치를 때. 아들이 얼마나 우리말을 귓등으로 듣던지, 명절에 시댁에 가서 시어머니 앞에서 이렇게 하소연을 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 우리가 무슨 나 좋으라고 그러는 거냐고요. 다 저그들 잘되라고 하는 말이잖아요. 근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요. 우리말을 하도 무시하니까, 나중에 그런 맘까지 드는 거 있죠? 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것들은 듣지 않겠구나. 큰일을 당해 봐야 그제야 깨닫겠구나. 부모가 옳았다는 걸. 에미가 아들에게 '당해 봐야 알게 될 거라니...!' 얼마나 말을 안 들으면, 부모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될 그런 생각까지 하게 만드냐 말이에요.
식탁 앞에서 내 말을 묵묵히 듣고 계시던 어머니의 표정이 살짝 웃음을 지었던가, 일그러졌던가. 순간, 섬광처럼 예전에 어머니와 정치에 대해 옥신각신하던 우리의 모습이 겹쳐졌다.
헐, 그때 어머니도 딱 이런 마음이셨겠구나!
'전쟁이 일어나 봐야 니들이 내 말을 믿겠구나...'
그때 시부모님은 한창 '땅굴'에 꽂혀 계셨다. 북한이 휴전선에서부터 서울까지 땅굴을 수십 개 이상 파놓았으며, 이 중 일부는 지하철이랑 연결되어 있어서 여차하면 북한군이 이 땅굴을 통해 우리나라를 쳐들어올 거라는 거다. 우리는 잘 모르겠지만, 이미 우리 주위에 수많은 간첩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일부 좌파 정치인들과 내통하며 호시탐탐 우리 사회를 적화통일시키기 위해 공작 중이라고 했다.
나는 당연히 반박했다. 상식적으로 그랬다. 아무리 따져봐도 시간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그 많은 땅굴을 파기 불가능했다. 지하철과 하수도, 광케이블 등에 복잡하게 깔려 있는 서울 시내에 아무도 모르게 땅굴을 판다는 것은 건축토목학적으로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무리 예를 들어 설명해 드려도 끄떡하지 않으셨다. 그 시절 대화는 늘 그런 식으로 흘러갔던 것 같다. 우리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으신 시부모님은 정치 이슈에 대해 우리가 무관심하면 너무 안일하다고 걱정했고, 조금이라도 반대되는 의견이나 논리적인 증거들을 들이밀어 반박하면 우리가 좌파들의 빨갱이 사상에 오염되어 있다고 걱정했다.
나는 북한 자체가 싫은 게 아니다. 북한 동포들은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통일을 함께 이루어야 할 한민족이 아닌가.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나는 공산주의 사상 그 자체에 대해서도 특별한 감정이 없다. 모두가 재산을 비슷하게 나눠 가지는 사회. 어떤 사람도 자신의 능력이나 무능력 때문에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 사회. 어떤 이들은 좋은 부모 만나 아무 노력 없이 거들먹거리며 살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임대료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지 말자는 게 공산주의 사상 아닌가. 어떤 사람도 서로 비교할 필요 없고 내가 흙수저란 생각 때문에 박탈감 느낄 필요 없는 그런 사회는 얼마나 이상적인가. 하지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 사상은 이미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폐기되었으며 구시대 유물로만 남아 있다는 걸.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제도보다 힘이 세다. 민주주가 완벽한 제도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이상은 현실화되며 훼손된다.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부 형태'일 수 있지만, 그나마 우리의 어두운 본성을 누르고 선한 본성을 잘 발휘하게 해 줄 수 있는 정부 형태이기 때문에 지지한다.
결정적으로 공산주의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하,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공산주의는 경제체제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고. 말 나온 김에 내가 싫어하는 건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니다. 자본주의다. 사람의 감정 중에서 가장 맹렬하고 가장 저열하며 가장 추악한 감정이라고 부르는 ‘사적 이익’을 무한대로 추구하게 하는, 인간의 탐욕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그 자본주의가 나는 싫다.
그러니 어머니. 저는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어머니, 제가 싫은 건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고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기 때문에 북한을 싫어하시면 안 됩니다. 독재를 경계해야죠. 저는 북한이 싫은 게 아니라 북한이 독재국가라서 싫어요. 이미 많은 국가에서 검증되어 폐기된 그 구닥다리 사상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악용하며 80년 가까이 독재를 하고 있는 김 씨 일가가 싫어요. 남한이 전쟁 후 불과 몇십 년 만에 이렇게 눈부신 선진국이 되어 가는 동안, 북한 정권이 이 똑똑하고 부지런한 한민족을 세뇌하고 억압하고 착취해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국민으로 만들어서 싫다고요. 그리고 이건 남한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남한의 대통령이더라도 그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으로 국민을 장악하려 듣다면 그는 독재자죠. 민주주의라면 서로 다른 의견이 상존하는 게 당연하건만, 소통을 통해 합의하는 방식 대신 가장 쉽고 무식한 방식인 무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면, 그런 사람은 국민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북한이든 남한이든 독재는 악하고, 독주하지 못하도록 저지되어야 합니다.
나는 정치에 대해 어머니 보다 많이 알고 있지 않지만... 어머니의 질문에 어쭙잖게 반박하는 세월 동안 그게 우리가 소중히 지켜나가야 할 민주적 가치라는 점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10여 년 전. 어머니와 세월호를 기점으로 이야기 나눌 때 깨달은 게 있다. 300여 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을 때, 그래서 내가 조금 정치에 눈뜨기 시작했을 때, 그나마 어머니께서 자신의 신념에 대해 조금 흔들렸을 때. 하지만 박근혜 탄핵이라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우리가 다시 각자의 정치색으로 돌아갔을 때.
박근혜에 대해 보이는 어머니의 이 흔들림 없는 지지는 바로 어머니 자신에 대한 지지였다는 걸 알았다. 전쟁의 폐허 위에 먹고사는 그 기본적인 것조차 너무 어려워 잠시 불법과 부정은 눈감고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자식은 나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기 바라는 마음에 경쟁과 능력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그러다 보니 정의나 다양성이라는 민주적 가치보다 독재자 박정희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그것은 지난 수십 년 간 어머니가 만들어온 자기 시대에 대한 가치요 지지였다. 그러니 어머니는 전쟁의 참상과 고달픔도 모른 채 부모덕에 잘 먹고 잘 살게 된 자식들이 자신이 살아온 시대에 대해 알면 뭘 안다고, 이렇게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와 자신을 거절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다.
정작 어머니께서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민주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독재라는 걸 모르시는 게 당연했다. 자기부정이 그렇게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