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았다는 은혜가 너무 커서 내가 너무 특별해지는 이야기
교회 안에는 간증이라는 문화가 있다. 삶에서 개인이 체험한 조금 특별해 보이는 은혜를 나누는 자리이다. 어떤 의미에서 간증이야말로 말씀이 말씀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실천하는 정말 중요한 방식인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런 간증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지나쳐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뜻으로 쉽게 왜곡되는 느낌이랄까. 신의 뜻이 사람의 해석을 거치며 축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대중 앞에 펼쳐놓으며 마치 자신이 신의 대언자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아우라가 불편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내가 '정치'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공공성이었는데, 어머니 세대의 정치에는 그 자리에 공공성 대신 애국심이 있더라고 얘기했던가. 애국심이라는 이상하게 붉은 마음. 그리고 가끔 나는 어머니 세대의 간증을 들으며 그 신앙 스토리텔링 안에서도 이상하리만치 애국심과 비슷한 아우라를 감지할 때가 있다. 신앙심이라는 사적이고 붉은 마음. 가령 다음과 같은 이야기.
바리바리 싸들고 피난을 떠났을 때였어. 오빠들과 아버지는 야산에 미리 숨어 있었고, 상황이 급박해지자 어머니는 뒤뜰에 급히 귀한 것들을 묻고 우리에게 채비를 시키셨지. 나는 언니들 손을 잡고 뭣도 모르고 피난길에 나섰어. 가는 곳곳마다 시체가 즐비했고, 강은 핏물로 넘쳐났지. 우리는 그나마 온전한 형체가 남아 있는 집이 있으면 그곳에서 하룻밤을 겨우 보내곤 했어. 사흘 째 되던 날이었나. 군인들이 밥을 나눠준다고 해서 큰 집에 피난민들이 잔뜩 모여 있었어. 그래서 우리도 한쪽 구석에 비집고 앉아 밥을 얻어먹었지. 근데 작은 언니가 빈대 때문에 더 이상 못 참겠다고, 갑자기 그 집을 뛰쳐나간 거야. 어쩔 수가 있나. 그렇게 헤어지면 끝장이니까,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작은 언니를 잡으려고 허둥지둥 쫓아 나갔어. 근데 얼마 못 가서 글쎄, 뒤 쪽에서 쾅~ 하고 큰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그 집에 폭탄이 떨어진거야. 멀리서 보니 커다랗게 파인 웅덩이만 남아 있더라고. 만약 작은 언니를 쫓아 가느라 그 집을 벗어나지 않았으면 우리도 모두 그 자리에서 그냥 죽었을 거잖야. 가슴을 쓸어내렸지. 하나님의 은혜가 따로 없었어. 이게 다 우리 집안이 하나님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아니고서야 어찌...
뭐, 역사도어차피 살아남은 승자들 편에서 쓰이는 것이니까. 솔직히 이 정도 해석쯤 그냥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다. 지금 남한 인구의 반 밖에 안 됐던 그 시절(2-3000만 명 추정). 사상자만 600만 명이 넘은 전쟁이니. 살아남은 은혜가 너무 커서 자신의 생존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그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때 그 집에 남아 폭탄을 맞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와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는? 그곳에 있었던 신앙심 깊었던 기독교인들은? 어머니 세대에는 전쟁의 참상이 있었다면, 우리는 이런 일련의 참사들을 겪은 세대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지켜보며 살아남았다는 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요행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재해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덮쳐 온다는 사실을. 물론 어떤 참사는 누적된 인재요 막을 수 있는 참사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미리 막을 수 있었다면 정말 더 좋았겠지만. 그걸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어느 때든 재해의 가능성 안에 놓여 있다. 이 세상의 불운은 내 아이와 나에게, 그리고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가리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 임한다. 자연재해처럼 무자비하고 예외가 없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닥친 불운과 실패는 하나님의 은혜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억지로 신앙심과 연결하려다 보니, 코로나 기간 동안에 일부 목사들이 코로나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둥 무식한 이야기를 해대는 것이다.
살아남은 것은 승리자의 증표도, 거룩함이나 구별됨의 표식도, 은혜의 증거도 아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진화론에서조차 '적자생존'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살아남는 것은 그 개체가 다른 개체보다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저 그 개체가 속해 있던 자연환경에 그가 잘 적응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 포식자를 잘 피하고 바뀐 자연환경에서 자신이 가진 어떤 특이점이 그를 그 환경에서 더 잘 적응하게 했을 뿐이다. 이렇게 설명해도 자꾸 나의 생존을 특별 은총과 결부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일화를 한번 더 전해 드리고 싶다. 나의 이십 대에 드물게 장기 베스트셀러였던 책,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개정과 복간을 반복하고 있는 <그 청년 바보의사>다.
안수현(1972.1.17~2006.1.5). 고려대학교 의학과 91학번, 내과전문의. 고려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쳤다. 영락교회 대학부 시절 '스티그마(예수의 흔적)'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의사의 삶을 꿈꿨다. 그는 바쁜 생활 중에도 신앙과 음악과 책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였으며, 그가 온라인에 올린 글은 차가운 의술 속에서도 따뜻한 인술을 전하며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병원에서 그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의 의술을 행하던 의사이자, 환자의 손을 잡고 치유를 함께 간구하던 의사였다. 의학분업사태로 전국 의사들이 파업을 할 때에도 그는 동료들의 비난을 뒤로하고 하루에 한두 시간씩 겨우 눈을 붙이며 환자들을 돌봤다. 하지만 2003년 군의관으로 입대한 그는 33세가 되던 2006년, 갑작스러운 유행성출혈열로 사망했다. 그를 알고 지냈던 지인들은 평상시 그가 남긴 일화와 칼럼 등을 모아 <그 청년 바보의사>라는 책을 발간했다. 전 예수병원 원장이자 생전에 그를 아꼈던 '설대위'라는 의사는 첫 챕터에서 그를 기억하며 이런 문장을 남겼다.
"과연 나는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환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내게 환자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의 가치와 충족한다면, 안수현만큼 오래 살아남아 하나님의 은혜를 설득력 있게 증명할 사람이 어디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이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고 그 자신 여전히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할 때 뜻밖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저 그는 하늘이 허락한 시간 동안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다가 부르실 때 홀연히 삶을 접었다.
그리고 그의 존재와 가치는 그를 잊지 못한 주변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가 생전에 이 땅에 남긴 기억을 통해 그는 우리에게 스스로 고백하는 누군가의 간증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한다. 누군가의 존재와 가치는 그가 살아온 생이 그저 묵묵히 증명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