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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구원의 확신을 묻는 폭력성

천국과 지옥, 이분하는 세계관

by 쏭마담


나는 모태신앙이다. 강남의 중산층 가정에서 큰 풍파 없이 자랐고, 부모님은 작은 개척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집사였다. 교회 목사님은 학생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는 등 우리 교회는 그 당시 엄근진 했던 교회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젊은 활기가 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할 때 크리스마스나 문학의 밤 같은 행사로 더 많이 기억되는 것으로 보아 말씀에 그다지 충실한 교회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기질적으로 순종적이었고, 부모님과 목사님의 태도에서 특별히 가식적인 점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한마디로 좋은 기억이 많은 교회였다. 그러니 내가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금요철야 예배를 빠지다가 급기야 주일 예배까지 안 나오는 일이 발생하자, 권면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청년부 회장 오빠가 어느 날 나를 부른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집을 벗어나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주일성수를 놓쳐본 적 없는 그런 교회 라이프스타일에 조금 식상해 있기도 했던 듯 하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나는 교회 오빠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말했고, 당황해 하던 회장 오빠의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구원은 확실하게 받은 거 같아요.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건 같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제 맘대로 좀 살아보고 싶어요."


좋게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초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유명한 경구의 이상한 버전인데, 사실 그게 핑계인 건 나도, 회장 오빠도, 그리고 방금 이 경구의 정확한 워딩을 요청한 챗GPT도 모두 알고 있었다.


좋아요~ 그 구절의 정확한 출처와 원문을 정리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

원문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St. Augustine), 요한일서 강해 강론 (In Epistulam Ioannis ad Parthos Tractatus, Tractate 7, §8)

“Dilige, et quod vis fac.”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을 단순한 “자유방임”이 아니라, 하나님(곧 사랑 자체이신 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은 자연스럽게 선해질 것이라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십 대 되바라진 여자애가 '자유방임'을 위해 끌어들인 그 나이브한 논리가 그 당시 교회와 성도들의 구원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결혼하고 나서 시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첫아이 6개월 때쯤인가. 그날도 나는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오신 어머니와 1시간 넘게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신나게 성경 얘길 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무늬만 크리스천에 가까웠기에 어머니가 먼저 내 신앙과 교리에 대해 점검하는 질문을 던지면 나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씀을 끌어와 내 신앙을 옹호하는 식이었다. 말미에는 당연히 말씀에 해박하신 어머니가 교정해 주시고, 나는 그 말씀에 골똘하며 다음 만남 전까지 심기일전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어머니의 질문에 반박하면서 나의 성경 지식도 차근차근 쌓여간 것 같다. 하지만 말씀 논쟁이라는 것이 그렇듯 늘 좋을 수만은 없었다. 그건 한 세계와 한 세계가 만나는 거대한 격돌의 순간이기도 했기에. 그리고 나만의 말씀과 논지가 쌓여갈수록 나는 어머니와 우리 세대와의 희미한 간극이 더 또렷해지는 걸 느꼈다.


일례로 어머니께서는 한동안 내게 '구원의 확신'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어머니 본인이 오랫동안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교회를 다니고 모든 봉사에 헌신했던 어머니. 주변에서도 늘 "권사님 만한 믿음이 없다"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마음 깊숙한 곳에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있으셨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스스로는 속일 수 없는. 설교 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그때부터 혼자 말씀을 집중적으로 붙들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갈라디아서 2장 20절 앞에 와르르 무너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회심을 경험하셨다. 그때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난 이후엔 한번도 믿음이 흔들려 본 적이 없으셨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너는 언제 구원의 확신을?"이라고 물어보시는 건 어머니 입장에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문제는 내가 그 질문 앞에 정확하게 몇 날 몇 시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말씀 앞에 확신을 얻었는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말꼬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참고로, 어머니는 구원파는 아니십니다 ㅎㅎ). 모태 신앙이었던 나는 그때까지 구원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지만, 내게는 여전히 죄책감과 죄짐이 남아 있었다(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니 내 맘대로 살겠다던 철없는 여자애에게 무슨 신앙적 깊이가 있었겠나). 어느 날은 확신에 차 눈물을 흘리며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기도 했지만 또 어느 날은 내가 믿는 자가 맞는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어머니 눈에는 이런 며느리가 내일이라도 당장 원의 확신 없이 죽는다면 지옥행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마음이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여, 어느 날 '출장 마사지 전문', 아니 '출장 구원확신 전문'쯤 되는 장로님을 내게 붙여 주셨다.


그 주 토요일. 우리 집으로 오신 그 장로님은 예의 내게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확신을 묻는 질문을 연거푸 퍼부었고, 나는 또다시 어쭙잖은 논리로 내 신앙을 항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쯤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그쪽 진영으로 영~ 넘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보였는지 장로님은 마지막 극약처방을 내미셨다. 장로님이 회심의 미소를 띠며 본인의 노트북을 열고 동영상 하나를 클릭했을 때, 그곳 화면에는 끝도 없는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콘스탄틴>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불교의 탱화 같기도 한 그곳엔 시뻘건 지옥불 한가운데를 배경으로 쉴 새 없이 지옥불로 떨어지는 인간들이 있었다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딱 알맞을 법한 불구덩이 속으로 반쯤 화상 입은 붉은 인간이 굴러 떨어지고, 그 뒤를 다시 온몸이 거무스름한 인간이, 그 뒤를 이어 다시 그 짓을 수천 번쯤 반복한 것처럼 보이는 새까맣게 탄 인간들이 연신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시시포스의 무한 형벌처럼 지옥불로 떨어지고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확신했다! 우리 사이에는 성령의 하나 됨으로도 가닿을 수 없는 또렷한 간극이 있다는 걸. 가부장적 질서 아래에서는 아무리 좋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도 좋은 시부 관계가 되기 어렵다는 그 진실만큼이나 먼, 우리 사이에는 실로 거대한 세대 간 격차가 있었다. 선과 악, 성과 속, 좌와 우, 남과 여, 교회와 세상... 그것을 철저히 구분하고 나와 같은 결론이 아니면 정죄하거나 틀린 되는. 인간과 인간사의 불가해함과 복잡다단함을 단순하게 재단하고 판단하는. 저 옛날 권력자들이 무지한 민중을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하던 공포 마케팅에서 별로 업그레이드되지 않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처럼 한때는 누군가에게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실효를 다한 전도 방식 앞에서 나는 알았다. 이런 이분하는 방식을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 기독교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세상에 빛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다행히 그 후 나는 한 신학자의 입을 통해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는 나의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고백을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믿음'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이유는 내게는 하나님이 그냥 '다가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그냥 '다가오는' 이들도 있다. 내 아내 폴라, 홀리패밀리성공회교회의 티머시 킴 버러 주임 사제, 내 친구 샘 웰슨에게는 하나님이 그냥 다가온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는 그와 같이 하지 않으셨다. 나는 기도가 쉬운 적이 없었다. 불평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런 내 모습이 하나님이 더 이상 그냥 '다가오지' 않는 세상에서 그분을 섬기는 것의 의미를 숙고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본다.
- <한나의 아이> 스탠리 하우어워스 저, IVP. (20-21p)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자신은 믿음에 대해 '선언'보다 그 선언이 '살아가는 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훨씬 많은 관심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말 그대로 개개인의 구원에 대한 확신 보다 그것을 살아내는 방식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있는 신학자였다. 믿음은 단순히 믿는다는 선언이 아니라 살아내는 행위를 함께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인다울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기독교의 무엇'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내가 다시 해석해 보자면, 그가 말한 '무엇'이 맨 처음 믿음이 우리 안에 믿음의 씨앗이 내린 순간이라면, '어떻게'는 그걸 매일매일 살아내야 하는 순간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구원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처럼, 믿음은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 이므로. 저 본향 천국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 인간은 이땅에서 불완전한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는 '과정'으로만 믿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내가 정의하는 믿음에 대한 해석은 늘 잠정적이며 나만큼 오류가 가득할 테니까. 내가 아무리 많은 경험과 지식으로 그걸 껴안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수많은 이들의 지식과 경험을 모두 포괄할 수 없다. 당연히 인간과 세상과 우주 그 너머를 모두 품으시면서도 동시에 그것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는 눈꼽만큼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의 믿음과 확신을 고백하는 일 또한 개개인의 삶의 경험과 개성만큼이나 다 다르다는 점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자기가 경험한 믿음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틀리다고 말하는 배타적인 기독교인들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오해하고 교회를 떠났던가.


내 생각에 기독교인들에게는 고질적인 강박 몇가지가 있는데 그 중 제일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같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알게 모르게 구원에 대해서도 어떤 확신과 정답을 요구하고 싶어하는 조급증을 낳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성경의 모호함 때문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개개인의 죄성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성경의 무오주의에 대한 강박도 기독교인들을 쉽게 오해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다. 구원과 전혀 상관없는 그 일점일획 때문에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이분했던가. 티모시 빌이라는 신학자에 의하면 '성경이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책이라는 그럴듯한 주장은 독자를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게 한다'고 말한다. 일례로 성경 속 인물 중 모순 없이 일관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어디 있던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의 첫 아들 이스마엘을 버린 호로 아비이고, 사라는 여종 하갈에게 기껏 자기 남편과 동침하라고 해놓고는 이삭이 생기자 모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천하에 나쁜 여자다. 그 둘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조상'이다.


성경에서 순도 100%의 어떤 것, 확실한 정답 따위를 찾으려다 보면 성경 자체가 우상이 된다. 우리의 구원의목표는 '그리스도'에 있지, '성경'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러니 내가 그때 어머니의 구원의 확신을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한두 마디 언어로는 그 깊고 넓은 믿음의 세계를 단언할 수 없었을 뿐이다.


나의 믿음은 지금도 완벽하진 않지만 여전히 내 안에 뿌리 내리며 자라고 있다. 구원을 향해 가는 구도의 과정 또한 내 안에서 진행중이다. 그러니 나는 이제 조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금 그 안에서 자유하다.

확신은 필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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