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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Jul 18. 2018

몸의 탄력성과 정신의 탄력성


생각날 때마다 신기해서 자주 얘기하는 부분 중에 하나인데, 내 몸무게는 고무줄 같다. 늘었다가 줄어드는 범위가 크다. 내가 느끼기에 이 폭이 큰 것이지, 남들 보기에 내 몸무게는 고무줄 몸무게가 아닌지도 모른다. 물론 거기까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가끔 먹성이 솟구쳐 평소보다 많이 먹으면, 금세 허리가 두툼해지고 뺨에 살이 오른다. 그러다 바쁜 일들을 연달아 해야 하거나 마음이 쇠약해지면, 얼굴빛이 푸르죽죽해지면서 몸에 있던 살집이 금세 빠진다. 살이 많이 빠질 때는 두 눈으로 내 몸 곳곳에 있는 뼈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이 고무줄 몸무게의 근원은 내 식습관에 달려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음식과 음료 전반에 대한 폭넓은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뭔가를 먹고 마시는 걸 정말 좋아하지만, 한 번 입맛이 떨어져 버리면 좀처럼 뭔가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음식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몸 생각하는 식이요법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 몸무게가 고무줄처럼 탄력 있다고 하기보다는, 내 먹성이 고무줄처럼 탄력 있다고 해야겠다. 몸무게는 먹성 변화에 따르는 결과물일 뿐이다. 체질적으로 체중이 잘 늘고 주는 게 아니라.   

  

탄력(彈力)이라는 단어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반응이 재빠르거나 힘이 넘치는 상태’다. 둘째는 ‘탄성을 가진 물체가 외부의 힘에 저항하여 원래 형태대로 돌아가려는 힘’이다. 고무줄이 가지고 있는 탄력의 의미는 후자의 의미에 해당한다. 


고무줄을 당기면 그 고무줄에는 탄력이 생긴다. 늘어나지 않았던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 몸에도 이런 종류의 탄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몸무게에 한해서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


어떤 사람의 적정 체중이 50kg라고 치자. 그 사람의 체중이 적정 수치를 벗어났을 때, 몸은 적정 수치로 돌아가려는 액션을 취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같은 밥을 먹어도 그 사람이 45kg일 때 영양분 흡수율과 55kg일 때 영양분 흡수율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인에게 스치듯이 전해들은 거라, 이게 정확한 정보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야기 속 논리가 어느 정도는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인체의 항상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항상성이라는 것은 ‘생물체의 생명 유지를 위해 체내의 환경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이 변화되어도 생물체의 체내 환경이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생물체는 생명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 우리가 운동을 할 때 호흡이 촉진되는 것은, 운동으로 인해 소비되는 산소 부족 및 이산화탄소 과다 생산 등을 조절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체중을 생각해 보면, 몸무게의 탄력성이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몸에 붙어 있는 살이 갑자기 지나치게 빠져 버리거나 늘어 버리면, 몸은 생명 활동에 다양한 지장을 받을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 몸은 체중과 관련한 위협 신호를 느낄 때마다 영양분 흡수율을 달리 한다고 뭇 학자들은 말한다. 관련 지식이 부족해, 몸이 그 밖에 어떤 조치를 취하는지는 모르겠다.     


몸에 탄력성이 있다면, 정신에도 탄력성이 존재하지 않을까. 평상시 정신 상태를 크게 흔들어 버리는 상황이 왔을 때, 정신은 평정을 되찾기 위해 무슨 활동을 할까. 심리적인 위협이 몰아닥칠 때마다 내 정신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나(내 정신, 의식 또는 무의식)는 어떤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대략적으로 찾고, 그 이유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스스로의 내면적인 혼란을 달래 왔던 것 같다. 어지러운 혼란이 지속되지 않도록. 혼란을 최대한 빨리 추스르고,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정신적인 위태로움이 감지될 때마다 내가 그 방법만을 사용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주로 그 방법을 사용한 건 사실이다. 맞닥뜨린 상황의 근본적인 책임이 나에게 있다면, 내가 직접 대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찾고, 그 상황의 근본적인 책임이 나에게 없다면, 필요 이상의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가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흔들어 깨우고. 물론 후자의 상황에서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뭔가를 찾지만, 책임자가 할 수 있는 일까지 하려고 나서지는 않는다. 그렇게 나섰다가 책임을 덤터기 쓴 적이 몇 번 있어서 조심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평상심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 평상심 되찾기 과정 동안에 나는 다른 불필요한 정신적 자극을 받지 않는다. 정신이 그것들의 유입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몸이 그러하듯, 정신도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꽤 애를 쓰는 것 같다.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있을 때는 제정신을 회복하기가 어렵지만. 이것은 낡은 고무줄 이야기에 빗대어질 수 있는 이야기다.


낡은 고무줄은 그것이 낡기 전의 상태보다 쉽게 끊어진다. 낡은 고무줄처럼 몸과 마음의 힘이 예전보다 취약해져 있을 때, 몸과 마음은 이전에 가능했던 대처 능력 및 회복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겪을 때마다 그 일을 경험하고 있는 내 상태부터 면밀하게 살피고 대응 전략을 짜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에 그리 살뜰하지 못해서 스스로를 혹사시킬 때가 많다. 내 상태는 고려하지 않고 나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지시만 하거나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저렇게 해야 한다고! 뭐하냐고!” 윽박지르기 때문에.


세월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그렇게 흐르는 세월 따라 내 상태도 계속 변화된다. 팽팽하던 고무줄이 차츰 낡아 늘어지고 약해지는 것처럼. 아직은 지긋한 나이까지 살아 본 적 없어서 내 몸과 마음의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내 눈앞으로도 중년의 나날과 노년의 나날이 펼쳐질 것이다. ‘내가 왜 이러지. 전에는 안 그랬는데.’ 의문스러워하던 끝에,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괴리를 이해와 받아들임으로 채워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어쩌면 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인간은 유형의 변화와 무형의 변화에서 뭔가를 느끼고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걸 ‘모른다.’고 한 이유는, 수많은 변화 모두에서 모든 사람이 뭔가를 느끼고 배우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두 제 그릇에 따라 느낌과 교훈을 담아내거나 비워내며 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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