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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스페인으로의 여행

[톨레도] 시간이 멈춘 천연의 요새

by Girliver

계절 때문에 산티아고 길을 먼저 걷고 나서 본격적인 스페인 여행은 나중에 하려고 한다. 내일은 까미노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이동해야 해서 남는 하루 동안 이곳 알베르게에서 만난 케이와 동행이 되어 마드리드 근교의 톨레도(Toledo)로 간다. 마드리드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50분쯤 걸리는 톨레도는 중세 스페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하늘은 비가 올 것처럼 꾸물거리는데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톨레도 성안으로 가는 길에 바라본 마을은 전체가 빨간 지붕, 멋스런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어 중세 유럽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버스정류장에서 성안으로 한참 동안 오른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낯설다는 말은 약간의 호기심과 두려움, 긴장감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새로운 공간 속을 세 달째 여행하며 느끼는 낯섦은 이전의 그것과는 달라져있다. 두려움의 크기가 현저히 줄어들고 수용할 만한 새로운 자극과 신선함이 커지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한 것 같은 낯선 풍경에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산타페 박물관과 산타크루즈 박물관이 보이고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는데도 어떻게 할지를 몰라 한참을 헤맨다. 초행자의 방향감각이란 늘 이렇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들락날락하면서 그럭저럭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물어서 길을 따라 올라간다, 시청의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아가니 그 앞이 드디어 톨레도 구시가의 중심인 소코도베르 광장(Plaza de Zocodover)이다.

다양한 건축양식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중세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 맥도널드도 보인다. 이런저런 관광객용의 전통 공예품이나 가죽 가게, 옷가게 등 상점들이 많고 그중에는 중세의 칼이나 방패를 파는 매장도 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길 한가운데에서 왼손에 책을 든 세르반테스(Cervantes) 동상을 발견한다. 돈키호테(Don Quixote) 발간 400주년 기념동상이다. 돈키호테의 땅을 딛고 있는 게 실감 난다.

소코도베르 광장에서 출발하는 빨간 소코트렌(Zocotren)에 올라탄다. 광장에서 출발해 통해 톨레도를 한 바퀴 도는 이 관광용 기차는 톨레도를 한 바퀴 돌며 전경을 보여준다. 잘 달리던 소코트렌이 멈추는 곳에서 잠시 내려 타호(Tajo) 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알칸타라 다리를 감상한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져 이슬람인 무어 왕조 때 완공되었다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의 '알칸타라'라는 이름은 무어 왕조 때부터 사용되었고 한다. 다리 이름 하나에도 역사가 스며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문화까지 이질적인 문화들이 수용되고 보존된 곳이 톨레도다.

소코트렌이 멈춰주는 뷰포인트마다 아름다운 톨레도를 시야에 넣을 수 있다. 톨레도는 타호 강의 북쪽에 위치하고 나머지 삼면은 강이 흐르는 천연 요새다. 북쪽에 성만 쌓으면 외적이 침입할 수 없으니 일찍부터 스페인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외곽에서 톨레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니, 소코트렌을 탄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와 소코트렌에서 내리니 새파란 추위가 품속을 파고든다. 비가 내릴 듯, 진눈깨비가 쏟아질 듯 아슬아슬한 하늘은 잔뜩 찡그려있다. 따뜻한 게 그립고 배도 고파서 식당을 찾는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큰 식당은 메뉴도 비슷비슷하고 비싸기도 해서 패스하고 그나마 스페인 사람들이 갈만한 곳을 찾는다.


스페인에서의 공식적인 첫 식사다. 뭘 주문해야 할지 몰라서 메뉴 델 디아(menu del Dia-오늘의 메뉴)를 주문한다. 와인, 맥주나 물 등의 음료가 먼저 서빙되고 그걸 다 마시니 빵과 초리소, 치즈, 하몽이 나온다. 가이드북에서나 보던 완전한 스페인 음식이다. 초리소는 소시지 같은 것이고 하몽은 우리나라로 치면 김치처럼 스페인 사람들이 늘 먹는 돼지 뒷다리 염장햄이다. 입에 딱 달라붙는 익숙한 맛이 아니긴 해도 나는 그나마 먹을 만한데, 엊그제 한국에서 나왔다는 케이는 먹는 게 곤혹인 것 같다. 어쨌든 허기 때문이라도 끼니를 때우게 되니 접시는 비워진다.

요기도 했으니 본격적으로 중세 분위기가 풍기는 톨레도의 골목들을 헤맨다. 시간이 멈춘 듯한 거리와 골목마다 사람이 지나간다. 가다 보면 막다른 골목에서 망연해 있는 우리에게 거주민들은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단체 투어가 서있는 유명한 건물 앞마다 사람들이 엄숙한 얼굴로 귀 기울이며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러나 길을 모르는 개별 여행자에겐 톨레도는 미로다. 미로인데 언덕을 오르내려야 하는 미로라서 한 번 잘못 가면 되돌아오는 길이 힘들다.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길을 잃는 건 당연지사다.

사람들에게 물으며 미로를 헤쳐 나가다 보니, 카테드랄이라 불리는 대성당(Catedral)이 나온다. 이슬람 세력을 물리친 기념으로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지은 성당이다. 이렇게 톨레도는 어디서든 그 역사와 함께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대성당 안의 모든 것이 그렇지만 스테인드글라스는 무척 아름답다. 성당 안은 예배를 할 수 있는 작은 성소들이 따로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게다가 엘 그레코(El Greco), 루벤스(Rubens), 고야(Goya), 벨라스케스(Velazqez)등의 대단한 화가들이 그린 성화들도 감상할 수 있으니 가히 “대성당”이 맞다. 남미에서도 그랬지만 남미나 유럽은 성당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꼭 들를 명소인 곳이 많다.

감탄하고 있는 옆의 서양인들이 이해가 된다. 종교가 다르거나 없다 해도, 살아온 문화의 배경이 이런 풍경인 저 사람들과 나는 느낌 자체가 다를 것이다. 물론 동양인인 대로, 종교가 없는 대로, 보이는 대로 보고 있는 여행자인 내 모습도 괜찮다.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가 들어있을 초 한 개 한 개가 모여서 타오르고 있는 모습에 시선이 간다. 간절함이라는 단어 앞에 마음을 놓아본다. 어디에 무엇을 보러 갔더라도 결국 사람과 그 마음이 남는 게 여행이다.

창이라고는 스테인드글라스로 가려져 있으니 대성당 안은 어둡다. 어둠을 뚫고 저 높은 천정에서 마치 천국에서 내려오는 빛과 같은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곳이 있다. 고개를 들어본다. 현란한 조각과 화려한 성화로 이루어진 '엘 트란스파렌테(El Transparente)'라는 채광창이 보인다.

엘 엑스폴리오(El Expolio), '의복을 빼앗기는 그리스도'라는 엘 그레코(El Greco)의 명화도 감상한다. 예수를 해치려는 사람들과 지키려는 사람들이 얽혀있는 예수 최후의 긴박한 장면의 붉은 옷을 입은 예수님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대성당에서 나와 이베리아 반도의 옛 도시를 만끽하며 골목을 돌아다닌다. 로마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중세 스페인의 고도는 아름다우면서도 이색적이다. 길을 잃고 당황스레 마주하게 되는 느닷없는 풍경이 오히려 더 좋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비는 다행히도 잠시 흩뿌리다가 멈춘다. 빈 하루를 채우려고 왔던 톨레도에서 중세의 고즈넉함을 만나게 되었다. 시간이 멈춘듯한 천연의 요새를 거기에 두고 마드리드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른다.


이 글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 걸어서 900km의 여정 직전의 여행기입니다.
까미노 여행기는 https://brunch.co.kr/magazine/go2santiago를 방문하시면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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