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아해의 소심한 복수 - 무시엔 무시가 답!
"도대체 저 아줌마 왜 이래?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하물며 아르바이트생한테도 저렇게 막 대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왜 저래 진짜."
돈을 받고 알바를 왔으면 얼마나 서러웠을까 생각하면서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하대하는 독불장군 아줌마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 아무리 작은 아빠 회사 사람이라도 돈 받고 일할 거 아냐. 무보수로 봉사활동하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 거야. 이건 회사에 확실하게 컴플레인 걸어야지. 어제 자기네 회사사람들 왔을 때랑 너무 비교되잖아. 그리고 왜 사람 가려가면서 누구한테는 존대하고 누구한테는 막대하는데? 나한테는 막 뭐라고 하고, 왜 언니랑 남동생한테는 공손한 건데?"
"나한테도 어제 엄청 심했어."(언니)
"누나, 나한테도 어제 그랬어. 그래서 나는 어제 엄청 공들여서 샤바샤바 해놨지." (남동생)
언니도 남동생도 불만은 있었지만, 어제에 이어 이틀 째라 원래 그러려니 하고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또 내가 예민해서 그런 거라고 그냥 무시하라고 했다.
'내가 예민해? 그래, 내가 예민하지. 항암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쉬는 게 맞는데... 그래도 동생들 힘들까 봐 여기 뛰고 저기 뛰는 데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해? 내가 '야! 야!' 거리면서 하대할 나이도 아니잖아."
39살, 나는 꼰대가 되어있었다. 아프다고 유세를 떨고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작은어머니께 가서 억울함을 전했다.
"작은 엄마, 아까 저 너무 열받아서 가발 던지고 한바탕 할 뻔했어요. 내가 환자라서 일 좀 못할 수도 있지. 왜 그렇게 사람을 못살게 구냐! 한 판 할 뻔했어요, 진짜."
작은엄마들은 까르르 웃으면서 재밌다며 웃어댔다.
하루하루 일당으로 일해준 저 도우미 이모들에게 내가 암환자이고, 환자이고 이런 건 중요하지 않겠지. 그런 건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야! 야! 거리면서 비아냥 거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그리고 나한테는 하대하고 왜 나이 어린 내 남동생한테는 극존대를 하는데...?
장남의 장남이자 집안의 종손이 되는 남동생에게는 '실장님(?)'이라고 부르면서, 난 그 남동생보다 3살이나 더 많은데 거기, 저기 부르면서 짜증 내냐는 말이다.
아무리 내가 상갓집에서 동생들과 상치우기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나 하고 있다지만 집안에서 내 위치는 나쁘지 않았다. 고모들, 고모부, 작은엄마들 모두 친했고, 손주들 서열로도 넘버투인데 해도 해도 너무했다.
함께 도와주던 동생들도 나중엔 화가 났는지 인상을 쓰거나 키 큰 이모님을 피했다.
'나를 무시하면 나도 무시해 주지.'
마인드를 바꿨다. 주방이모님들, 키 작은 이모님께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키 큰 이모님은 아는 척하지 않았다. 바쁠 때도 내 마음대로 앉아서 쉬었다.
'이모님, 저 이모님이 무시할 정도로 핫바리(?) 아닙니다. 여기 키 큰 저 언니, 오빠들(?) 다 제 밑이라고요.'
한 2시간 동안 내 맘대로 하면서 이모님 아는 척 안 하고 내 맘대로 하다 보니 나중에 겨우 반존대로 대꾸하셨다.
'저에게 존대하면 저도 존대하고, 반말하면 저도 반말합니다.'
혼자 이모님과 소리 없이 전투 중인 나를 보고 남동생과 언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나만 진지하냐고? 나만 무시하니깐 화가 나는 건데... '
결국 크게 여론 형성에 성공한 나는 엄마와 작은엄마에게 어필했고, 이모님들을 조금 더 빨리 조기 퇴근 시키면서 사태를 일단락시켰다. 나한테 화내고 내 동생들한테도 신경질 낸 아줌마는 엄마가 주는 수고비라는 명목의 현금 보너스를 받고 그대로 조기 퇴근하셨다.
나만 부릉부릉 하고 나만 화나는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걸 참을 수 없는데, 다들 아무렇지 않아 했다. 다들 내 성격이 예민하다는데,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하는 게 이상한 게 됐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네가 어려 보였나 봐. 아까 아줌마가 묻더라고. 나한테 정수랑 남매냐고. 그래서 맞다고 했거든. 그러니 오빠냐고 묻더라. 그래서 아니 제가 누나고 정수가 동생이라고 했지. 엄청 놀라더니 둘만 남매냐고 물어서 너도 함께 3명이 삼 남매라고 했어. 그랬더니 너보고 막내냐고 묻더라. 그래서 아니고 쟤가 넘버 2고 남자애가 막내라고 했어."
언니는 기분 풀라고 해준 이야기였지만 고작 그걸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키도 작고, 동생들이랑 함께 열심히 일한 나를 '일 못하는 답답한 애' 취급했다는 게 확실한 거였으니까.
<일 안 해본 티가 난다고요?!>
'일 못한다는 말'은 일종의 나의 발작버튼 같은 거였다.
나는 참 열심히 일하는데, 일은 잘 못하는 것 같다. 어릴 때도 엄마가 시키는 일만 주로 했지,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편이 아니었고, 일할 때도 대부분 주도적인 것보다는 협력하거나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편이 편했다.
회사 다니거나 사회생활은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맞췄으니까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제일 문제는 가사와 비슷한 일, 몸을 쓰는 일이었다. 손도 느린 편이고 동작도 빠른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내가 손 빠르고 빨리빨리 해야 하는 일은 많지 않았기에 실제로 마음도 그리 조급하진 않았던 것 같다.
대학교 2학년 때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손이 작아서 컵을 한 번에 옮기지 못해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더니 호프집 이모님이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내밀어보라셨다.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손을 내밀었고, 손을 보더니 알겠다면서 웃으셨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손을 보니 일을 못하게 생겼다고 하셨다. 일을 안 해본 티가 난다고, 곱게 자란 거 같다고 하셨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 지 몰랐는데 그게 일을 안 해본 티가 난다는 거였다. 나도 나이 먹고 사회생활을 해보니 그 이모님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했지만, 굳이 사회에 맞춰 나를 일하는 기계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넌 공부 열심히 해서 몸 쓰지 말고, 펜 굴리면서 살아라."
이모님의 충고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펜 쓰는 삶을 사는데,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 젠병인 살림이 내 앞을 또 막아섰다.
<발작 버튼의 시작>
결혼하고 몇 해정도는 시할머니 제사에 참석했었다. 남편이 종손이라는 것도 있었고, 매번 참석했는데 결혼했다는 이유로 빠질 수 없다는 게 남편의 의견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남편의 친적들까지 다 모인 제사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장남 며느리의 할 도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참석했다. 그때는 마침 동서는 임신 중이라 참여하지 못해서 시어머니와 작은어머니들만 계셨다. 가장 나이가 어리고 젊었지만 살림 경험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서 대부분 잔심부름만 맡아서 했던 거 같다.
어머니가 주시는 대로 식탁에 놓여둔 반찬을 상으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반찬을 하나씩 옮기고 있으니 작은어머니가 다가와서 도와주셨다. 그러다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어머니께서 답답해하시면서 버럭 하셨다. (아마 꺼내놓은 김치를 썰지 않고 바로 들고 갔다는 이유였던 것 같다.)
신혼 4~5년 차의 일이었다. 첫 아이 육아를 끝내고 둘째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순간 서러움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결혼 4~5년 차에 이런 일로 꾸지람을 받을 정도로 내 살림 솜씨가 형편없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어머니는 다시 차분해지셨고, 그 뒤로 비슷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 더 큰 폭탄이 나를 내려쳤다. 지금 뒤돌아보면 그날이 아마 나의 몸에 '암씨앗'이 제일 강하게 들어찬 순간이었다. 아마 그날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이른 나이에 암투병을 하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망스러웠다. 그날이, 그리고 그날의 시어른들의 폭탄들도 모두 다.
그날 시제사에 참석하고 나는 마음도 몸도 너덜너덜해졌다. 가만히 있어도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눈물만 나왔다. 억울함에 하소연해도 남편은 그 당시 내 편이 아니었다.
저녁이 되자, 거실에 시어머니와 시 작은어머니들 사이에서 자리를 펴고 누웠다.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어머니 버럭했던 목소리와 버릇없다는 작은아버지의 술주정 소리가 머리에 가득 넘쳤다. 어머니 도와드리려고 내려왔는데, 일 못한다는 꾸지람이나 받는다는 게 너무 속상했다. 몇 날 며칠을 눈물로 보냈던 것 같다. 시 작은아버지의 술주정이 가장 큰 폭탄이었고, 시어머니의 일 못한다는 뉘앙스도 작은 폭탄쯤은 됐었다.
알고 있다. 나도 내가 일을 잘 못하는 것을. 하지만 해보지 않을 일은 내가 처음부터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모르는 게 있으면 답답해하지 않고 알려줘야 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일하는 요령이 없다고?!>
이틀 째날 저녁 언니와 남동생이 둘러앉아 오붓한 술자리를 가졌다. 술자리라기보다는 수다시간이었다. 어릴 적 이야기부터 아침에 장례식장에서 분개한 이야기까지 모두 이어졌다.
나는 또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분명 이모님이 잘못하신 건데 왜 화를 내는 나만 탓하는 걸까.
"누나가 너무 티가 안 나서 그래. 나는 티 안나는 일은 안 해. 나는 솔직히 하나도 안 힘들었어.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들 나만 보면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하더라." (남동생)
"나는 오늘 지지리 고생했는데...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힘들게 일했는데 왜 나한테는 이러는데.. 더구나 나는 환자인데..."
"나는 알아. 너 오늘 진짜 고생했어. 진짜 열심히 했어. 나는 알지 너를 아니까 네가 엄청 오늘 열심히 했다는 거 알아. 내가 알아줄게 그러니 기분 풀어." (언니)
언니와 남동생은 나를 위로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한테 그래? 이해가 안 돼..."
"네가 이해해. 아줌마들이 보기엔 좀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어."
"뭐가??"
"뭐 그런 게 있어.. 나야 사회에서 까라면 까고 하라면 다 하잖아. 근데 넌 막부리는 일을 많이 안 해봐서 이런 상황이 이해가 안 갈 거야."
"그래, 누나가 이해해. 나도 하도 이런 취급 저런 취급 다 당해서 그러려니 해. 그 아줌마 처음엔 나한테도 막대했어. 그런데 식구들이 자꾸 나만 찾고, 어른들도 나한테 막 얘기하고 그러니깐 그때부터는 나한테 잘하더라고 원래 그런 사람인 거야. 신경 쓰지 마."
"근데 뭐가 그렇게 보였다는 거야? 내가 뭐 이상한 거 했어?"
"이상한 건 아니고... 조금 그렇게 보였던 게 있어."
"그게 뭔데?"
"아~ 나... 뭔지 알 것 같아."
언니의 말에 남동생에 대꾸했다.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있었던 걸까? 나는 열심히 일했는데 도대체 사람들 눈에 뭐가 보였다는 걸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