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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경 Jul 29. 2019

나 다운 공책

눈여겨보지 않는 나만의 부끄러움

집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고 한다. 어떤 재질의 소파를 쓰는지, 침대의 높낮이는 어떤지, 자잘한 소품들이 어디에 배치돼있는지를 보면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집은 등받이도, 팔걸이도 없는 직사각형의 원목 소파에 작은 매트리스를 놓고 쓰고 있다. 팔걸이가 없는 대신 침대처럼 쭉 뻗고 누울 수 있고, 등받이는 쿠션이 베개 겸 등받이를 대신하고 있다. 침대는 바닥에 딱 붙어있어 침대 밑을 청소할 필요도 굴러 떨어질 걱정도 없다. 자잘한 소품을 좋아하지만 지저분할까 모두 서랍 속에 넣어놓고 꺼내지 않는다. 우리집에 놀러 온 사람들은 참 나 답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 나는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공책을 많이 샀다. 공책을 사는 건 어려웠던 집안 사정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죄책감 없는 사치였다. 기껏해야 오백 원, 천 원 하는 공책을 못 사게 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공책은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이었다. 노래방 간다고 하면 열리지 않던 엄마의 지갑이 공책을 산다고 하면 기꺼이 열렸다. 나는 그 돈을 허투루 쓰는 일 없이 공책을 샀다. 겉표지가 예뻐서 사고, 내지의 줄 간격이 마음에 들어 샀다. 한 권 두 권 책꽂이에 공책이 늘어나면서는 책장을 무지개로 물들이기 위해  빨주노초파남보 색깔에 맞는 공책을 사기도 했다. 공책을 사는 일은 내게 가장 즐거운 일이며, 스트레스를 푸는 수단이었다.


그렇게 사 모은 공책에 나를 조금씩 나눠 담았다. 1번 공책에는 내 하루를 담았다. 그 날 있었던 일, 저녁 메뉴, 날씨, 노래방에서 불렀던 노래 목록 등등을 기록했다. 2번 공책은 잡생각을 담았다. 의미불명의 문장들, 씻다가 생각난 멋있는 말을 적었다. 3번은 여러 위인들의 명언들을 베껴놓고 가끔 꺼내봤다. 공책은 나를 담는 그릇이었다.


내 공책의 유통기한은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나는 변덕과 부끄러움이 많았다. 내가 쓴 글들을 보면 창피해서 어쩔 줄 몰랐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나. 누가 보지도 않았지만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뛰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공책을 찢었다. 찢은 자리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곧 공책은 다시 찢겨 나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보면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다 쓴 공책이 완성됐다.


찢는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더 부끄러움을 느꼈다. 글을 잘 썼든 못썼든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이 찢어진 공책에서 나온다는 걸 한참 후에 깨달았다. 찢어진 자국은 자를 대고 아무리 자르려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예쁘게 잘려나간 흔적이었다. 그 자국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지만 나는 공책을 펴면 그것만 보였다. 내가 나를 찢어낸 것 같았다.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 한동안 공책을 사지도 글을 쓰지도 않았다.


이제는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큰 맘먹고 샀던 공책 한 권만 쓰고 있다. 더 이상 불필요하게 공책을 사지 않는다. 7년이 훨씬 넘은 이 공책엔 아직 50장도 채 적지 못했다. 그래도 50장의 이야기가 온전히 담겨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부족한 글이 태반이지만 그래도 부끄럽진 않다. 매번 글을 공책을 마주하다 보니 곧 공책이 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이 나 답다는 우리집에는 소파도, 침대도, 자잘한 소품도 아닌 나 밖에 모르는 가장 나 다운 공책이 잠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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