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자 Feb 23. 2020

책으로 만나는 봉준호 감독의 이야기

tbs교통방송 심야라디오 프로그램 황진하의 달콤한 밤'의 책 소개 코너 '소설 마시는 시간'입니다.

매주 토요일에서 일요일 넘어가는 자정에 95.1MHz에서 들으실 수 있어요.


2월 23일 백아홉 번째 방송은 책으로 만나는 봉준호 감독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방송이 '소설 마시는 시간'의 마지막 방송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설 마시는 시간 멘트↓


ann 책 속에 담긴 인생의 지혜를 음미해 보는 <소설 마시는 시간> 오늘은 어떤 주제로 이야기 나눠볼까요?

요즘 최고의 화제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하면서 말 그대로 봉준호 신드롬, 기생충 신드롬이 일었죠. 최고상인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극영화상까지 받으며 한국 영화사뿐 아니라 세계 영화사를 새로 썼죠.


ann 우리 시간으로 2월 10일 오전이었죠. 벌써 2주 가까이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그때의 감동이 남아 있어요.     

그만큼 한국 문화사에 대단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으니까요. 영화계의 큰 경사지만 봉준호 신드롬이 서점가도 강타하고 있거든요. 봉준호 감독이 에세이 한 권 쓴 적이 없는데 웬 서점가의 신드롬인가 싶죠. 바로 기생충 각본집이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건데요. 작년 9월에 국내에 기생충 각본집이 출간됐는데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전까지는 누적 1만권 정도가 팔렸대요. 그런데 시상식이 열린 10일 하루에만 재고로 있던 1200권이 다 팔려서 지금은 중쇄를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ann 봉준호 감독은 직접 모든 작품의 각본을 쓰는걸로 유명하죠.     

맞습니다. 기생충 각본집의 작가의 말을 보면 봉준호 감독이 이런 말을 남겼어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시나리오를 쓰고, 스토리보드를 그리고, 촬영을 하고, 편집과 녹음을 한다. 이 단계들을 꾸준히 일곱 번 반복한 것이 지난 20년간 나의 삶의 전부다.’

그리고 이 각본집의 매력은 그냥 배우들의 대사만 담긴 게 아니라 봉준호 감독이 그린 스토리보드에도 있는데요. 스토리보드는 영화 속 장면의 초안을 그린 문서거든요. 이 스토리보드를 실제 영화 속 장면과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해요. 봉준호 감독이 머릿속에 그렸던 장면이 실제 영화로 어떻게 구현됐나 비교할 수 있는 거죠.


ann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더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군요.     

그렇죠. 우리가 ‘봉테일’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그만큼 봉준호 감독이 디테일에 강하다는 이야기인데요. 기생충에서도 그런 장면이 참 많았죠. 옥의 티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는 그런 작품. 그 비결이 바로 꼼꼼한 각본 작업과 스토리보드 작업에 있는 것 같아요. 봉준호 감독이 2009년에 만든 ‘마더’라는 영화가 있어요. 김혜자 배우와 원빈 배우가 함께 나온 작품이죠. 이 ‘마더’의 각본집인 ‘마더이야기’를 제가 참 좋아하는데요. 마더이야기의 스토리보드도 거의 어지간한 만화책 못지않게 자세하고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어요.


ann 기생충만 그런 게 아니라 이전 작업들에서도 봉테일의 힘은 똑같았던 거네요.     

스토리보드를 보면 카메라는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고 하는 것들이 사전에 다 계획돼 있는 걸 확인할 수가 있거든요. 배우들의 시선, 눈빛 이동까지도 사전에 다 정해져 있고요. 그야말로 봉테일의 진수죠. 이 마더이야기 서문에서 봉준호 감독이 남긴 말이 참 재밌는데요. 이런 말을 해요.

‘모든 것을 미리부터 통제하고 싶은 욕구와 나 자산의 통제에서 벗어나 매 순간의 충동을 따르고픈 욕구가,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을 이룬다.’

봉테일과 창의성 사이를 줄타기하듯 오며가며 마스터피스를 만드는 게 바로 봉준호 감독이구나 싶죠. 봉준호 감독의 각본집을 읽으면 봉준호 감독을 더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M1 새소년 – 긴 꿈

https://youtu.be/pgm4VRxMcew


ann 오늘은 서점가를 강타한 봉준호 신드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각본집 이야기를 좀 했고요.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해볼까요?     

사실 봉준호 감독이 직접 책을 쓴 적이 없다보니 저희 방송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나 참 고민이 많았는데요.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분석한 평론집은 아무래도 재미가 덜하니까요. 봉준호 감독의 생생한 목소리를 최대한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그래서 고른 책이 한 권 있습니다.


ann 어떤 책인가요?     

‘영화 같은 시간’이라는 제목의 책인데요. 이 책은 한국영화아카데미 3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책입니다. 영화에 매료돼 영화계에 뛰어든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한국영화아카데미난 1984년에 문을 열어서 지금까지 70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한 한국 영화계의 사관학교 같은 곳이죠. 여기를 거쳐간 수많은 감독들 중에는 임상수, 허진호, 김태용, 최동훈 같은 이들이 있고, 오늘의 주인공인 봉준호 감독도 그중 하나죠.


ann 그럼 이 책에도 봉준호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겠군요.     

맞습니다. 졸업생들이 에세이도 쓰고 단편 소설도 쓰고 다양한 글이 나오는데요. 봉준호 감독은 최동훈 감독과 함께 대담을 진행해서 그 전문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전체 책의 3분의 1 정도가 이 대담인데요. 대담의 형식이 그렇듯 봉준호 감독의 생생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 기사는 여기저기서 접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책은 봉준호 감독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전의 이야기죠. 학창시절 같은 아카데미를 다니는 학생 시절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서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도 많아요. 최동훈 감독도 타짜, 암살, 도둑들 같은 걸출한 영화를 만든 거장이잖아요. 봉준호, 최동훈 두 감독이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뻘쭘한 농담을 주고받는데 키득키득하면서 읽게 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ann 지금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거장이지만, 봉준호 감독도 데뷔 이전의 초짜 감독 시절이 있었던 거네요.

봉준호 감독이 연세대학교 출신인데 거기서 영화 동아리를 한 이야기도 나오고요. 영화아카데미에 처음 준비하던 이야기도 나와요. 그런데 그때 아카데미에서 입학시험으로 영어를 봤다고 해요. 왜 영화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영어를 보나 의아하면서도 두 달 동안 영어 학원을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했대요. 봉준호 감독의 영어 실력이 수준급이라는 이야기가 많잖아요. 그 출발이 바로 이 영어학원 덕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죠.


ann 영화감독이 아닌 학생 봉준호의 모습은 상상이 안 가요.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를 다닌 시기가 1990년대 중반인데요. 그때 여느 대학생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대요. 낮에는 술을 마시고 강의실에서 자다가 밤에 경비아저씨한테 쫓겨난 일화도 이야기하고요. 그러다가 외국의 유명한 영화 시사회를 아카데미에서 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보고 충격받았다고 하고요.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을 아카데미에서 처음 보고 ‘우와 뭐야 이게!’ 하고 충격받은 이야기도 하는데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쿠엔틴 타란티노와 친밀하게 인사하던 모습도 생각나죠. 


M2 브로콜리너마저 –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https://youtu.be/9bXaWHBec_I


ann 오늘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봉준호 신드롬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있어요. 책으로 만나는 봉준호 감독의 이야기. ‘영화 같은 시간’에 실린 봉준호 감독과 최동훈 감독의 대담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재밌는 뒷이야기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봉준호 감독의 감독 데뷔작이 ‘플란다스의 개’ 잖아요. 2000년에 개봉한 영화죠.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봉준호 감독의 재능을 알아보고 이 영화의 제작을 맡은 덕분에 영화가 나올 수 있었죠. 그런데 여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더 있는데요. ‘플란다스의 개’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숨은 이유가 바로 영화 ‘화산고’입니다.


ann 화산고는 장혁 배우가 나온 무협 코미디 영화잖아요. 이 영화랑 플란다스의 개랑 무슨 관련이 있나요?     

봉준호 감독이 스스로 고백하길 ‘플란다스의 개’는 영화가 워낙 이상하고 그래서 제작 투자를 받기가 어려웠대요. 그런데 마침 싸이더스에서 ‘화산고’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대작 취급을 받으면서 투자하겠다는 곳이 많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화산고에 투자하고 싶으면 플란다스의 개도 같이 투자해라. 대신 플란다스의 개는 저예산이라 9억원만 투자하면 된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끼워넣기를 한 거죠. 그리고 이 덕분에 투자를 받아서 플란다스의 개도 만들어질 수 있었고, 봉준호 감독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화산고 덕분에 봉준호 감독의 오늘이 있었다는 말도 비약을 많이 보태서 가능할 것 같습니다. 

ann 화산고와 봉준호 감독의 상관관계는 전혀 몰랐네요.     

봉준호 감독의 별명인 봉테일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최동훈 감독과 봉준호 감독의 각본 작업 스타일이 정반대예요. 최동훈 감독은 초고를 엄청 빨리 쓰고 이후 열댓 번 넘게 계속 고치는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봉준호 감독은 초고를 한 번 쓰는데 6개월, 1년씩 걸린대요. 그리고 한 번 다 쓰면 많이 고치지 않고 비교적 초고대로 촬영을 시작한다고 하고요. 그러니까 초고를 쓰는 작업이 굉장히 어렵다고 털어놓는데 막 이런 꿈도 꿨대요. 한 번은 산에 올라가서 한 나무 아래를 팠더니 오동나무 상자가 있고 거기에 시나리오 일곱 권이 있었대요. 읽어보니 기가막힌 시나리오라서 속으로 ‘아 15년 동안 영화 찍을 수 있어’ 이러면서 산을 내려왔대요. 내려오고 보니 잠이 깼고 꿈이어서 슬펐다는...


ann 얼마나 시나리오 쓰는 게 힘들면 꿈에서도 시나리오 찾아다니는 꿈을 꿀까 싶네요.     

봉준호 감독은 보통 조용한 카페의 구석 자리에 앉아서 두세 시간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편이라고 하는데요. 카페 서너 곳을 정해놓고 눈치 보일 때쯤 다른 카페로 옮기는 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용한 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작업이 끝날 때쯤에는 꼭 작업을 했던 카페가 문을 닫더라는 슬픈이야기도 하고요.

성사되지 못한 화려한 라인업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영화아카데미 졸업하고 나서 박찬욱 감독이 봉준호 감독에게 직접 연락을 했대요. 봉 감독의 시나리오를 읽고 장편 작업을 해보자고 한 거죠. 그 영화의 제작사가 이준익 감독의 제작사였다고 하는데, 만약 그 작업이 성사됐다면 제작 이준익, 연출 박찬욱, 각본 봉준호 이런 라인업이 나왔겠죠.


ann 그야말로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을 작품이었겠네요.     

작업이 성사되지 않은 게 아쉬울 따름이죠. 이 책에 나오는 봉준호 감독과 최동훈 감독의 대담은 뭔가 영화에 대한 거창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영화를 사랑하고 꿈꾸는 무비 키드들이 어릴 적에 갖고 있던 꿈에 대한 이야기 같아요. 이제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봉준호 감독도 이렇게 영화를 꿈꾸는 학생 시절이 있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죠. 아카데미를 다니던 25년 전의 봉준호 감독의 모습을 찬찬히 읽어가다보면 지금의 봉준호 감독을 더 사랑하고 응원하게 됩니다.


M3 언니네이발관 – 2002년의 시간들

https://youtu.be/SOxkvGudblE


ann 오늘은 책으로 만나는 봉준호 감독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봉준호 감독이 좋아하는 책은 혹시 있을까요?

봉준호 감독은 독서광이면서 만화광으로도 유명한데요.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본인이 강추하는 만화를 두 편 소개한 적이 있어요. 먼저 국내 작가인 앙꼬 작가의 ‘나쁜친구’라는 만화가 있어요. 이 작품은 세계 최대 만화 축제인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새로운 발견상’을 받았어요. 이 작품은 봉 감독의 추천뿐 아니라 국내외에서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한번 꼭 읽어보면 좋을 것 같고요.


ann 또 다른 작품은요?     

찰스 번즈의 ‘블랙홀’입니다. 찰스 번즈는 미국을 대표하는 만화가 중 한 명인데요. 1970년대 시애틀을 배경으로 고등학생이 벌레병에 걸려 돌연변이로 변한다는 독특한 이야기입니다.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이라는 아이스너상을 받은 작품인데요. 봉준호 감독이 좋아하는 조금 어둡고 비뚤어졌지만 인간 사회 내면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깊이있게 다루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ann 봉준호 감독에 대해 영화가 아닌 책으로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참 많네요.     

영화든 책이든 결국 다 연결돼 있는 것 같아요. 봉준호 감독의 작품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늘 문학의 위기다, 서점의 위기다, 책의 위기다 이런 말을 많이 하죠.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늘 뭔가를 읽고 보고 있잖아요. 천만 영화도 계속 나오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늘 뭔가를 찾아 읽고, 콘텐츠 정기구독 서비스에서도 늘 새로운 콘텐츠가 올라오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런 콘텐츠의 근원을 찾아가면 결국 책이 있는 거죠. 책의 위기라는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이유죠. 결국 좋은 콘텐츠, 좋은 이야기의 뿌리에는 책이 있는 거니까요.


ann 책의 미래는 밝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밝을 수 있다고요. 오늘이 저희 코너의 마지막 방송인데요. 마지막은 좀 더 긍정적이고 밝은 이야기를 하면서 마무리하고 싶었어요.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도 더 많은 책, 더 좋은 책을 많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M4 술탄 오브 더 디스코 – 숱한 밤들

https://youtu.be/aZlN7y6Cgpk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이 아픈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