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명작, 지구를 지켜라! (2003)
지구를 지켜라! (Save The Green Planet!, 2003)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는 개봉 당시, 작품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배급사의 잘못된 마케팅, 무거운 주제, 당황스러운 결말 등 복합적인 원인들로 인해 흥행에 참패한 비운의 걸작이다. 문제점은 포스터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포스터만 봐서는 자칫 삼류 코미디 영화로 오해하기 쉽지만 이 영화는 그런 단순한 코미디물이 아닌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을 꼬집는 블랙 코미디라는 걸 알고 봐야 한다.
작품은 초반에 어떤 이상한 남자가 대기업 회장을 납치해 외계인이라는 이유로 고문을 하는 둥 다소 황당한 상황들이 연출된다. 작품은 중반까지만 해도 그저 미쳐버린 주인공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반복되는데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주인공의 과거가 드러남에 따라 주인공이 왜 지금까지 그런 일들을 해왔는지에 대한 이유가 제시되면서 작품이 전하고자 했던 것이 ‘사회의 부조리가 낳은 비극’임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는 무거운 주제를 코미디로 표현해서 그런지 평이 많이 엇갈린다. 혹자는 이 작품이 그저 미친 사람이 지배층에 대해 앙심을 품고 외계인으로 몰아 사람을 고문하다가 끝에 가서는 진짜 외계인이었다는 스토리로 받아들이고는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졸작으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스토리의 맥락도 짚어내지 못한 성급한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데, 먼저 이 작품은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은 부조리, 구체적으로는 계급주의의 폐단을 지적한다.
주인공 병구(신하균 분)는 어린 시절부터 비극을 겪고 자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다. 병구의 비극에는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계급에 의한 갈등이다. 병구와 그가 사랑했던 이들은 항상 자신보다 힘 있는 존재들에게 당해야 했으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병구는 이런 부조리한 사회와 불우한 자신의 현실에 대한 도피로써 자신이 살고 있는 지구 밖의 존재인 외계인에 심취하게 되고,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무리들을 지구를 좀먹는 외계인으로 인식하고서 자신의 복수를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엽기적이고 잔인한 복수를 해나가던 주인공에게 극 중의 강 회장(백윤식 분)은 그런 주인공의 행동도 주인공을 괴롭혔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며 주인공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신념을 흔들고, 인간만큼 동족을 학대하고 그것을 즐기는 종족은 없다는 말과 함께 스크린에는 인간이 자행해 온 학살의 역사들이 비춰진다.
스크린에 비춰지는 학살의 역사는 너무도 사실적이고, 끔직할 정도로 비참하다.영화의 엔딩에서는 인간들을 구제하려던 외계인 왕자(백윤식 분)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음을 느끼고, 희망이 사라져버린 지구를 멸망시킨다. 지구를 지키려 노력한 병구가 오히려 지구의 멸망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후에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 부분에서 지구가 멸망한 뒤, 우주 속을 떠돌던 병구의 TV는 병구의 생애를 재생한다. 병구의 TV는 병구가 외계인들을 고문하며 감시하던 도구란 걸 생각하면, 그 안에서 재생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주인공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끝으로 영화의 후반에 주인공의 처지를 다 안다는 형사의 형식적인 위로에 주인공은 묻는다.
“다 알면서 내가 미쳐가는 동안, 너희들은 어디 있었는데?”
"니들이 더 나빠."
무관심 속에 홀로 남겨진 우리 사회의 '병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