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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킵고잉 Jun 17. 2024

비엔나에서 만두를 먹으며

나는 지금 오스트리아 빈의 Capistrangasse 8번지, 카페 카프카에 앉아있다.


아주 오래된 카페로 내 왼쪽에선 에단호크 같은 어떤 남자가 책을 읽고 있고, 오른 쪽에선 줄리 델피를 닮은 여자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어정쩡하게 그 사이에 앉아있다. 70년대 오래된 재즈가 흐르는 이 곳, 밖에선 우산을 쓰지 않아도 좋을 비가 내리는 절묘한 분위기. 이렇게 맘에 쏙 드는 카페를 만나는 것도 흔치 않은데. 멜란지 커피를 시키자 오래된 커피잔에 그보다 더 작은 물 컵이 따라 나온다. 과연 멜란지 커피는 거품이 쫀쫀하군...



이렇게 완벽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지금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아무래도 내가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 같다. 오전에 들른 미술관 카페에서 내가 인종차별을 한 것 같다....


오늘 아침. 


에곤실레와 클림트 그림이 많은 레오폴트 미술관이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아끼는 검은색 점프슈트와 구두가 놀고 있는 것도 아깝던 차, 걸어만 두었던 그 옷을 입고 미술관에 가보기로 한다. 이제 나는 저가 호텔과 피곤에 지친 여행객이 아니라 비엔나에서 살고 있는 어느 부잣집 유학생, 아니 적어도 부잣집 사모님처럼은 보이겠지. 입만 안 열면 돼... 아마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평소와 달라진 나의 모습에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레오폴트 뮤지엄에서 에곤실레, 코코슈카, 클림트에 맘껏 빠져든 후, 2층에 있는 카페에 갔다. 미술관 앞 광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멋진 카페다. 카페에는 키가 크고 어리버리한 백인 웨이터 (키다리)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키 작은 아시아계 웨이터 (땅콩)가 있었다. 키다리가 아는 척을 안하길래 지나가는 땅콩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 맘에 드는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역시 아시안이 빠릿하군. 


멋진 창가에 자리를 잡자 키다리가 메뉴를 가지고 온다. 고민 끝에 포케를 시키자, 메뉴판에서 몇몇 메뉴만 주문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건 미리 말해줘야지, 키다리?! 소세지와 교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오스트리아에서 만드는 교자는 무슨 생뚱맞은 맛일까 하고 시켜봤다.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고 (10.5유로). 커피를 시키고 싶었지만, 교자와 커피는 아무래도 각이 안나와 그냥 물을 달라고 했다. 오스트리아는 물은 수돗물도 알프스 물이고 수질관리에 진심이라며. 



뭔가 거무튀튀한 감자떡 같은 모양에 안에 제대로 들은 것도 없는 교자가 나온다. 이런 것도 교자라고 쳐주나? 요리 똥손이 밀가루 반죽을 한 시간 쯤 주물럭 거리다 만든 만두같은데... 대충 먹고 풍광만 즐기다 나가기로 한다. 난 예술에 취했다가 잠깐 고향의 맛을 잊지못해 만두를 먹는 사모님이니까. 자, 이제 계산할 차례. 늘 팁을 얼마를 줘야할지 고민하는데, 키다리, 얜 또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때 마침 땅콩이 지나가길래 계산을 하겠다고 눈짓을 했고, 그가 왔는데-.


나는 그에게 카드를 건넸고, 그는 빠르고 완벽한 영어로 뭐라 뭐라 하고는 명랑하게 계산을 해버렸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영수증을 주지 않았다. 아마 그게 어긋남의 시작이었을까? 쾌활하게 Have a nice day! 하길래 나는 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영수증을 받고 거기에 팁을 적는 게 국룰 아니던가? 하지만 그가 너무 빠르게 금액을 말하고 계산을 해버리는 바람에 팁에 대해서 언급할 시간이 없었다. 혹시 서비스비를 나 모르게 청구한 것인가? 팁을 동전으로 좀 남겨줄까 했지만, 내 가방은 미술관 안 락커에 맡겨놓은 상태였고... 그리고 내가 어리둥절하는 사이 땅콩은 쾌활하게 인사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래, 이건 나의 의도가 아니었으니까 그냥 팁 주지 말고 가자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집으로 오는 동안 땅콩에게 팁을 주지 않은 게 내내 신경쓰였다. 내가 너무 화려해보여서 땅콩은 차마 나에게 팁을 달라고 하지 못했을까. 푸어 땅콩... 대체 아까 교자는 얼마로 계산된 거지? 하고 집에 와서 핸드폰으로 결제된 내역을 봤는데. 


교자는 분명 10.5유로였는데, 13유로가 결제되어 있었다. 이건 10% 서비스 팁을 넣었다고 해도 맞지 않는 숫자다. 


돈에 가장 민감해지는 때가 언젠줄 아는가? 환율 때문에 계산이 잘 안되는 여행지에서다. 예전에 태국에서 길거리 티셔츠를 하나 사는데, 주인 붙들고 엄청나게 흥정했다. 그 주인이 조금 한심하다는 말투로 몇 푼 안되는 걸로 왜 그러냐고 하더라.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2백원을 깍아달라고 흥정하고 있었다....


암튼 여행지에서는 바가지 때문에 유난히 민감해지는 것이다. 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고 말았다. 쾌활한 땅콩이 호감상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사모님 룩이면 대우 받을 줄 알았던 나의 어리숙함을 책망하면서.  


이쁘게 옷 입으면 사람들이 친절할 줄 알았지?

돈 있어보이면 호구로 보고 등쳐먹는 세상이야! 여지껏 그걸 몰랐어!?


대략 5천원 차이일 뿐인데 백만 원은 뜯긴 기분이었다. 내 안의 전투본능이 수직상승했다.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사모님 이쁜 옷을 입고 진상짓을 할 수는 없다. 면티에 청바지로 다시 입고 정신 무장을 한 후 바로 미술관으로 직진. 땅콩, 너 사람 잘못 봤다. 이런 전투력이 극상일 때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해야 한다. 머뭇대다간 일을 그르친다. 엄청난 보폭으로 바로 그 멋진 카페로 들어간다. 저돌적으로 땅콩에게 직진한다.


"나 기억하지? 검은색 옷 입고 저기 앉아서 교자 먹은 사람."

그는 무슨 일일까 조금 갸우뚱한 표정이다.


"영수증 좀 주겠니?"


그는 허둥대기 시작한다. 영수증을 찾아보느라 여기 저기 뒤지고 난리다. 후후... 그럴 수밖에. 내가 다시 돌아와 영수증 보자고 할 줄은 몰랐지? 하이고야... 저저 깜짝 놀라서 허둥대는 짓거리 좀 봐라. 손님 등쳐먹은 결과라니. 쯧쯔....


그리고 그가 영수증을 찾아 내 눈 앞에 디밀었을 때, 거긴 이렇게 적혀있었다.

교자 10.5

물 2.5...........

.

.

.

.


"물이 2.5라고?"

"Yeah"

"물 너무 비싸다...."

"I know"

.

.

.

.

도망나오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사모님이 팁도 안주셨으면서 영수증까지 확인한다니.....

처음에 영어 잘하고 쾌활한 땅콩이 호감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바가지 썼다고 생각하자 마자 땅콩의 인상은 순식간에 바뀌었더랬다. 그리고 나는 키작고 노란 얼굴의 땅콩을, 사모님 삥땅치는 사기꾼으로 지레짐작했다. 정작 키다리보다 땅콩은 처음부터 끝까지 명랑하고 쾌할하게 나를 대했고, 팁을 요구하지도 않은 빠릿한 사람이었다........


그 식당, 분위기는 꽤 괜찮은 곳이었는데, 난 다시 그 곳에 갈 수 없겠지.

땅콩, 꽤 괜찮은 웨이터였는데 난 다시 그를 볼 수 없겠지.


땅콩, 미안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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