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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o Oct 12. 2020

학자의 여정

A Scholar's Quest

서론


조직사회학자인 제임스 마치(J. G. March)는 2011년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의 교수진을 상대로 <학자의 여정 A Scholar's Quest>이라는 제목의 짧은 강연을 합니다. 이 연설에서 그는 근대 이후 서구의 지적 전통에는 인간에 관한 이른바 '결과주의적(consequentialist)' 관점이 짙게 드리워 있으며, 그러한 관점이 너무나 널리 일반화된 탓에 나름의 장구한 계보를 지닌 대안적 관점은 종종 잊혀진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마치가 '결과주의'라고 부르는 이 관점은 경제학의 인간상과도 궤를 같이합니다. 이 관점은 행동을 합리적 선택으로 이해하고, 선택은 기대와 인센티브에 의해 추동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대안들을 기대되는 결과에 비추어 평가하고 매력적인 기댓값을 선사하는 전략을 채택하는 존재로 그려지지요. 그런데 사실 결과주의는 경제학보다도 특히 고전 공리주의에서 더욱 노골적인 형태로 표현됩니다. 벤담(J. Bentham)이 그려낸 공리주의의 세계에서 인간은 쾌락과 고통이라는 단일한 스펙트럼에 놓인 단순한 존재로 격하됩니다. 인간은 효용, 혹은 마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결과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위하여야 하며, 효용극대화의 원칙을 거스르는 행동은 비합리적이거나 심지어 비윤리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계몽주의의 수호성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벤담에 대하여,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은 이렇게 논평한 바 있습니다: 


벤담은 인간을 결코... 욕망 자체를 위해 욕망하고, 좋음이나 나쁨에 대한 기대 가 아닌 내면의 의식에 따라, 자기 스스로 세운 탁월함의 기준에 응답하기 위하여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이해하지 않았다.    

  

철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면 벤담의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벤담의 결과주의적 사고방식에 아주 익숙합니다. 우리는 결과주의적인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때로는 강요하기까지 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지요. 왜 열심히 공부합니까?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좋은 대학에 가야 하나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이지요. 왜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할까요? 높은 연봉을 받고 결혼시장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입니다. 질문은 계속 이어지고, 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우리는 선택을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에 근거하여 정당화하는 일에 너무나도 젖어든 나머지, 그것이 하나의 삶의 양식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런 물음에도 맞닥뜨리게 됩니다: 왜 사는가? 이때 우리는, 앞의 다른 질문들에 대답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이 물음에 대응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공리주의적 설명에 만족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생에는 향락 이상의 무언가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실존적 감각을 느끼게 되지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인지 결과주의적인 관점만으로는 결코 온전히 대답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물음의 저변에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근원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치가 제시하는 대안적 관점은 인간을 단지 결과와 인센티브를 셈하고 그 기댓값에 근거하여 행위하는 '합리적' 존재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성(humanity)의 반쪽에 불과합니다. 마치가 결과주의에 대비하여 '비결과주의(nonconsequentialism)'라고 부르는 이 관점은인간을 내면의 요구에 응답하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관한 자아상(self-conception)에 따라 의사를 결정하거나 행위를 정당화하는 존재로도 이해합니다. 이 전통은, "기대, 인센티브, 욕구를 이야기하는 대신, 자아상, 정체성과 올바른 행실에 대해"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상의 전범으로 마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제시합니다. 자신의 기행을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돈키호테는 기댓값과 결과값에 근거한 어떤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이렇게 대꾸할 뿐입니다: "Yo se quien soy - I know who I am."      


영감으로 가득한 방랑 기사의 응답은, 행위를 반드시 외부적 기준에 비추어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는 위대한 진실을 가르쳐 줍니다. 인간은 어떤 합리적 기대를 품고 행동하기도 하지만, 자기가 그리는 자아상에 충실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성공과 실패, 의미와 무의미, 행복과 불행, 풍요와 가난으로 삶을 재단할 수도 있지만, 내면에 스스로 세운 탁월함의 기준에 따라 삶을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우리가  신뢰가  담보될  때에만  신뢰하고,  사랑을  되돌려받을  것을  확신할  때에만  사랑하며,  배움이  가치  있다고  여겨질  때에만  배운다면,  우리는  인간  본성의  불가결한  부분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 즉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가 그리는 자아상에 충실하게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이처럼 합리성의 협소한 시계(視界) 너머로 눈을 돌리면 우리는 잊고 있었던 인간의 또 다른 측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래의 글은 March 교수님의 <A Scholar's Quest>를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별표시는 역자가 표시한 각주로, 게시물 최하단에 내용을 기재하였습니다.




학자의 여정 

A Scholar's Quest*


James G. March

translated by Juno**


근대가 그려낸 인간행동의 모습에는 계산적이고 결과주의적인 전통이 짙게 드리워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은 결과주의적 세계관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특히 경제학이 그렇다. 행동은 선택이고, 선택은 기대와 인센티브, 그리고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사상의 뿌리는 멀리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제레미 벤담의 사상과 그 현대적 발전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고, 오늘날에 들어서는 L. J. 새비지와 존 폰 노이만의 천재성으로부터 강력한 힘을 부여받았다.


오늘날 도처의 응용경제학(또는 경영학) 대학들이 이러한 결과론적 신학을 신성한 교리로 삼고, 의사결정과 전략의 문제들을 그와 같은 관점에서 다루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대안들을 기대되는 결과에 비추어 평가하고, 매력적인 기댓값을 선사하는 전략을 채택하며, 인간이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가정에 터잡아 그들을 경영하려고 한다. 물론 이런 사상은 인류의 발전에 있어 중대한 공헌을 했다. 그 사상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은 쉬이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사상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근대의 결과주의적 세계관의 수호성인이라 할 수 있는 제레미 벤담에 대해,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성”을 가졌다고 논평한 바 있다. 밀은 다음과 같이 썼다:


벤담은 인간을 결코... 욕망 자체를 위해 욕망하고, 좋음이나 나쁨에 대한 기대가 아닌 내면의 의식에 따라, 자기 스스로 세운 탁월함의 기준에 응답하기 위하여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이해하지 않았다. 

***


벤담에 대한 밀의 평가는 우리에게도 통용될 만하다. 완전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벤담이 그랬듯이, 인간행동을 이해하고 추동하며 정당화하는 두 번째 장구한 전통을 주시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 전통은 결과에 대한 기대로 행동을 설명하는 대신,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정체성이 부여하는 의무감과 자아의식의 발현으로 행동을 이해하며, 특히 그러한 정체성과 자아의식은 인간의 위대한 제도의 에토스와 실천으로부터 형성된 것으로 본다. 이 전통은 기대, 인센티브, 욕구를 이야기하는 대신, 자아이해, 정체성과 올바른 행실에 대해 말한다.


이 두 번째 전통은 오늘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특히 비즈니스 스쿨의 강당에서 더욱 그러하지만, 장구하고 위대한 계보를 자랑한다. 많은 고전 문학과 철학 저술에서 이를 엿볼 수 있지만, 인간 정신에 대한 위대한 증언인 《돈키호테》에서 이는 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자신의 기행을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돈키호테는 기대와 결과에 근거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네. (I know who I am - Yo se quien soy.)” 돈키호테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요구하는 것보다 내면의 자아의 요구를 더 일관되고 충실하게 따른다. 그는 현실세계에서는 광인이었지만 스스로의 자아정체성에 대해서만큼은 온전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결과의 논리보다 올바름의 논리를 따르기로 선택했다. 그는 이해득실(self-interest)보다 자기존중(self-respect)을 좇는다.


돈키호테의 기행담이 선명하게 그려내듯이, 자아의식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그 나름의 혼란과 제약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성을 비결과주의적(nonconsequentialist)으로 이해하는 관점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위대한 열정, 위대한 헌신, 그리고 위대한 행동은 좋은 결과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올바른 삶이라는 임의적(arbitrary)****이고 조건을 따지지 않는 요구를 그대로 포용하겠다는 의지로부터 나온다. 돈키호테는, 우리가 신뢰가 담보될 때에만 신뢰하고, 사랑을 되돌려받을 것을 확신할 때에만 사랑하며, 배움이 가치 있다고 여겨질 때에만 배운다면, 우리는 인간 본성의 불가결한 부분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 즉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가 그리는 자아상에 충실하게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자리에는 이 같은 이야기가 썩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를 교육자라고 칭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일상적 함의를 갖는다고 믿는다. 우리가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일련의 가치 있는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는 점은 틀림없지만, 우리는 또한 지식과 배움을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신념의 표현으로서 추구하고 경외하기도 한다.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학문(scholarship)의 전통과도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점을 자각하면, 우리는 비즈니스 스쿨을 오늘날의 담론이 전제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 결과주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다.


최근 들어, 비즈니스 스쿨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비유들은 시장을 묘사하는 비유들과 전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비즈니스 스쿨의 과제는 부유한 고객과 후원자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만한 교육 프로그램과 PR 활동을 구상함으로써 학교의 지속가능한 운영을 담보하는 문제로 이해된다. 물론 이런 관점은 때로 유용한 통찰을 낳기도 하고, 아무런 성찰 없이 치워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 관점만으로는 교육적 정신의 깊은 본질을 결코 포착할 수 없다.


대학은 그저 부수적으로만 시장이다. 그보다 깊은 대학의 본질은 신전, 즉 지식과 인간의 탐구정신에 바치는 신전이다. 대학은 배움과 학문이 개인과 사회의 번영에 기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인간성에 대한 비전을 상징하고, 지속시키며, 후세에 전달하기 때문에 경외하는 장소이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결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종교는 종교라 부를 수 없다고 썼다. 우리는 대학 교육과 학문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과 학문이 쓸모 있음이나 유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임의적인 신념의 문제로 받아들여질 때 이들은 비로소 그 이름에 걸맞는 가치를 갖게 된다. 고등교육은 계산이 아니라 비전이고, 선택이 아니라 헌신이다. 학생은 고객이 아닌 사도이며, 가르침은 교육이 아니라 성례(sacrament)이다. 연구는 투자가 아닌, 간증이다.


만약 누군가가, 거의 확실히 그렇겠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낭만주의적인 망상에 불과하다고, 이토록 어리석은 짓에조차 결과주의적 정당화는 필요하다고, 전통과 신념에는 모종의 진화적 이점이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면, 돈키호테가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방랑 기사가 무슨 이유가 있어 광인이 된다면 거기에는 명예도, 칭찬받을 일도 없다. 중요한 핵심은 어리석은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는 것이다.”******


매일의 힘겨운 일상을 마주하는 가운데 이런 고고한 감상은 다소 엉뚱해 보일 수 있고, 나는 결과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교육의 전당을 지켜내고자 한다면, 이를 인센티브에 반응하고 결과값을 계산하는 학장, 기부자, 교원과 학생들로부터 구해 내어, 자아의식과 소명에 응답하고, 지식과 배움이 올바른 삶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하며, 자신의 돈벌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읽고, 자신의 평판을 확보하거나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연구하기보다는 학문의 이상을 드높이기 위해 연구하며, 이 배움의 장을 아름다움과 인간성에 대한 확증으로서 지켜내는 일에 헌신하려는 자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한지, 나아가 상상할 수조차 있는지, 나는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돈키호테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고 선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스칸디나비아 친구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이는 썩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각주

* March, J. G. (2011). A scholar's quest. Journal of Management Inquiry, 20(4), 355-357.

** 모든 강조 표시는 역자가 추가하였습니다.

*** 「Man is never recognised by [Bentham] as a being capable of... desiring for its own sake, the conformity of his own character to his standard of excellence, without hope of good or evil from other source than his own inward consciousness.」

**** 이 글에서 'arbitrary'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저자는 이를 'random'의 의미보다는 'calculative'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효용극대화의 공리에 충실히 따르는 인간행동의 모습은 아주 논리정연하고 일관되며 예측가능하지만, 저자가 찬미하는 내면의 요구에 응답하는 인간행동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는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글에서 'arbitrary'는 모두 '임의적'으로 번역하였습니다.

***** 이 에세이는 March 교수님이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의 교수진을 상대로 한 강연록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비즈니스 스쿨의 존재의의를 뿌리부터 흔드는 불편한 내용인 까닭에 이런 코멘트를 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도 이와 같은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면 됩니다.

****** 「For a knight errant to make himself crazy for a reason merits neither credit nor thanks. The point is to act foolishly without just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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