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에 파리의 잡지사 샤를리 엡도가 총격테러를 당한 충격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후 "내가 샤를리다(Je suis charlie)"라는 구호와 함께 파리 곳곳에 내걸린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의 초상화를 기억할 것이다. 본명보다 '볼테르(Voltaire)'라는 예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 인물은, 이를테면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자인 장 자크 루소만큼 유명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볼테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이 말은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하지만, 헛소리를 지껄일 당신의 권리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 누가 보아도 볼테르가 했을 법한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 문장은 볼테르의 전기를 쓴 에블린 홀(Evelyn Hall)이 그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한편 이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역시 볼테르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명언으로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는 말도 있다. 이번에는 영락없이 인터넷의 누군가가 지어낸 말로 보이지만, 놀랍게도 볼테르가 실제로 한 말이다: "On parle toujours mal quand on n'a rien à dire." 볼테르의 것이든 아니든, 이 말들은 구체제의 권력과 종교적 광신을 날카로운 위트로 해체하던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 나는 파리와 에펠탑과 샹송과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 못지않게 볼테르를 좋아한다. (볼테르는 몽테뉴, 카뮈, 레몽 아롱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프랑스인이다. 그중 으뜸은 볼테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2012년에는 영어권 저자가 쓴 볼테르 전기를 번역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천성적인 게으름으로 작업을 미루다가 이듬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미실현 프로젝트로 남았지만, 만약 성공했더라면 나의 이름을 달고 나온 첫 번째 책이자 국내 최초로 출판된 볼테르의 전기가 되었을 테다. 니컬러스 크롱크의 이 책이 올해 번역 출간되면서 '국내 최초의 볼테르 전기'에 이름을 새길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훌륭한 개설서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역자의 손을 거쳐 마침내 출간되었으니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다. (참고로 이 책은 옥스포드 출판부에서 펴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시리즈의 볼테르 편을 옮긴 것이다.) ⠀ 볼테르는 명언 한 마디만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물이다. 볼테르가 평생 불관용에 맞서 싸우긴 했지만 관용의 투사라는 페르소나가 확고하게 굳어진 것은 비교적 생애 말년에 이르러서였고, 널리 알려진 통념과는 달리 그는 군주정의 확고한 지지자였다. 죽고 난 뒤에는 혁명의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면서 팡테온으로 이장되었지만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프랑스혁명의 광기와 살육을 앞장서서 비판했을 것이다. 볼테르는 또한 종교적 광신을 말 그대로 혐오하면서도 디드로처럼 무신론자가 되지는 않았으며, 프랑스인이면서도 영국의 온건하고 실용적인 정신을 흠모했고, 문필가이면서도 한때는 경험과학에 매료되어 아이작 뉴튼에 심취했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84세까지 천수를 누렸고, 연극, 시, 산문, 서간문을 비롯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쉴틈없이 글을 써댔다. 그가 쓴 글을 다 합치면 만 편이 넘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볼테르라는 인물의 윤곽을 그리는 일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몽테스키외나 루소를 이해하려면 《법의 정신》과 《사회계약론》을 읽으면 되지만, 볼테르는 자신의 사상에 체계를 세우거나 그런 체계를 한 권의 저서에 집약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볼테르를 이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의 저서가 아닌 전기를 읽는 것이다. 크롱크의 이 책은 짧은 분량임에도 볼테르의 삶과 저작을 다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길잡이 역할을 탁월하게 해낸다. ⠀ 그러나 볼테르는 무엇보다도 권력, 편견, 광신, 불관용에 맞서 자유와 이성, 관용을 향해 투쟁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오늘날 "볼테르의 이름은 그의 저술을 초월하는 일단의 가치들, 즉 편견과 미신에 대한 혐오, 이성과 관용에 대한 믿음, 그리고 언론의 자유와 동의어다." 그를 이러한 위상에 자리매김하도록 한 결정적인 사건은 1761년의 장 칼라스 사건이었다. 개신교도였던 장 칼라스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장남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툴루즈 고등법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모든 증거는 소위 '피해자'가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자살했다는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고, 칼라스 자신도 죽는 순간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가톨릭 법관들은 이를 무시했다. 칼라스는 이듬해 끔찍한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사형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볼테르는 격분했다. 그는 칼라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종교적 편견에 휘둘리는 프랑스 사법체계를 비판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훗날 드레퓌스 사건에서 "나는 고발한다 J'Accuse"를 외친 에밀 졸라에게도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사용한 무기는 펜이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줄기차게 편지를 썼고 1763년에는 《관용론》을 출판했다. 결국 1764년에 추밀원은 툴루즈 법원의 판결을 파기했고, 칼라스와 그 유족들은 1765년에 이르러 마침내 모든 혐의를 벗었다. ⠀ 볼테르는 그가 "파렴치(l'Infâme)"라고 부른 적, 즉 "명백하게 해롭고 합리적으로 반증 가능한 신념들에 집착함으로써 기본적인 인간성조차 부정하는 사람들"에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복잡한 철학이나 사상체계를 원용하는 대신 보편적인 인간성에 호소했다. 비록 프랑스혁명에서 발전한 것과 의미가 같지는 않았으나 '인권(le droit humain)' 개념을 사용했고, 자연이 우리에게 역지사지의 태도로 서로를 대할 것을 가르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물론 당대에도 새로운 것은 아니었고, 그가 대단히 독창적이거나 엄밀한 사상가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 쓴 것들의 기저에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 깔려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그를 루소나 디드로와 같은 동시대의 계몽사상가들 사이에서 돋보이게 했다. 그의 사유는 이를테면 루소의 '인민의 일반의지론'이 그랬던 것처럼 집합과 추상과 관념의 세계로 솟아오르는 법이 없었다. 볼테르의 사유는 '감각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에피쿠로스적 인간상에서 출발했으며 언제나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살과 피와 뼈로 이루어진 구체적인 인간, 기뻐하고 고통받는 인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서지기 쉽고 오류로 점철된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토록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이 형이상학적 도그마와 종교적 맹신을 위해 살과 뼈로 이루어진 다른 인간을 찢고 태우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경계했던 "파렴치"의 다른 이름은 '확신'이다. "의심은 불편한 상태이다. 그러나 확신은 터무니없는 상태이다. (Doubt is an uncomfortable condition, but certainty is a ridiculous one.)" 볼테르는 거침없는 풍자와 조롱으로 파렴치에 맞섰지만 그 또한 인간이었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무력감도 느낀다. "나는 덜 불공정한 사람들이 사는 어느 외국 땅에서 살다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 지금껏 인간의 자유를 옹호한 사상가는 많았다. 그러나 2015년 파리에 다른 누구도 아닌 볼테르의 초상이 내걸렸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절망의 순간에 그보다 더 체계적이고 엄밀하고 탁월했던 다른 사상가들을 제치고 볼테르가 우리를 결집시키는 깃발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만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인간성에 주목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가 볼테르를 더 일찍, 보다 깊이 알았더라면, 바다에서 몸이 찢기고 태워진 한 인간을 이데올로기와 정쟁의 도구로 삼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