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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o May 31. 2021

O린이


교보문고 인스타그램에서 “요즘 유행하는 O린이라는 표현은, 어린이를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로 보는 편견을 내포하는 어린이 혐오 표현”이라는 주장을 담은 게시물을 보았을 때, 나는 게시된 유튜브 링크를 타고 들어가 관련 영상을 끝까지 시청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것이 믿을 수 없이 멍청한 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호기심이 동했고, 둘째, 그토록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버젓이 하고 있다면 내가 미처 생각 못한 논거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것이 자비의 원리Principle of Charity다).



놀랍게도, 10분에 달하는 그 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죽만 울리고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나 논증은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근거랄 법한 대사는 “O린이는 미숙하다라는 의미로, 아동을 불완전한 존재, 부족한 존재로 보는 편견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죠”라는 딱 한 줄인데, 이것은 논거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정당화가 필요한 또 하나의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당신의 언어습관을 교정하라는 도덕적 요구를 하면서 이처럼 부실한 논증을 제시하는 것은 지적으로 게으른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주장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겠다는 목적 달성 자체에도 해가 된다. 논증이 없는데 내가 대체 왜 설득당해야 할까? 개소리라고 생각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나는 「‘O린이’가 부당한 편견을 내포하여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방금 “‘O린이’가 편견을 내포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지는 “’O린이‘가 혐오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표현 대신 괄호친 것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함의를 간략히 이야기하려 한다.


첫째로, 나는 따옴표 친 것과 같은 간략한 표현들이 개념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채 오용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 ’혐오‘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으로 자리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혐오‘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혐오‘가 뭘 뜻하는지 일종의 느낌적인 느낌은 있지만, 명확한 정의를 제시하기가 힘들다. ’혐오‘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주어진 사태가 ’혐오‘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는 가령 “x는 y일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혐오표현이다” 따위의 형식으로 명료하게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따르면 ’OO혐오‘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혐오‘의 의미를 위와 같이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애초에 그 사람들의 관심사는 세계를 정확하게 진단하거나 생각을 명료하게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혐오‘ 등의 표현을 무기처럼 휘둘러 타인을 공격하려는 것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O린이‘가 험오표현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혐오‘가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데 ’O린이‘가 어린이 혐오인지 아닌지를 도대체 어떻게 판단하냐는 것이다. 내게는 ’혐오‘가 예컨대 ’볿솘‘ 따위의 무의미한 기호의 나열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둘째, 편견이 그 자체로 나쁘지는 않다. 편견 가운데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부당한 편견이 나쁜 것이다. 예컨대 “가격이 비싼 물건은 언제나 품질이 더 좋다”는 생각도 하나의 편견이지만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부당한 편견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속성은 편견 자체가 아니라 그 편견을 도덕적으로 부당한 편견으로 만드는 어떤 부가적인 속성에 있는 셈이다.


내친김에 생각을 끝까지 이야기하자면, ’O린이‘는 애초에 편견 자체를 내포하지 않는 표현이다. ’O린이‘라는 은유의 핵심은, 어린이가 삶을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것처럼 ’O린이‘도 어떤 것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이‘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에 내포된 것이므로 부당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편견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 미숙함은 어떤 것을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속성이지 ’어린이‘의 핵심적인 속성은 아니며,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O린이‘가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어린이는 삶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서툴고 미숙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 때문에 어린이의 미숙함은 어른의 미숙함과는 다른 평가를 받는다. 어른의 미숙함이 평가나 지적의 이유가 되는 반면 어린이의 미숙함은 이해하고 포용하여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O린이‘라는 표현도 초보자의 미숙함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의도로 사용되는 것이지, 비하나 평가의 의도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O린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맥락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O린이‘가 이른바 혐오표현이라는 주장은 언어의 사용 맥락을 일체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영상의 마지막 부분이 제일 가관이다. 진행자는 ’어린이‘의 어원을 아냐고 묻는다. 이 단어는 1920년대 소파 방정환 선생이 만든 단어로서, 어린이가 ’젊은이‘나 ’늙은이‘처럼 동등한 인격체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만든 단어라고 한다. 그런데 ’어린‘의 기본형인 ’어리다‘는 중세 국어에서 ’어리석다‘를 의미했다. 진행자의 논리대로 어원을 따지고 들자면 소파 방정환 선생부터가 어린이 혐오자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어가 현재 언어공동체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느냐를 살피는 것이지 지금의 의미와 전혀 무관한 어원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느끼는 지점은 이게 어떤 개인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올라온 게시글이 아니라는 점, 오히려 지식을 유통하는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그것도 국내 최대의 대형 서점인 교보문고에서 이토록 허술한 주장을 버젓이 SNS에 올렸다는 점에 있다. 극단적이거나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소수의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있으므로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필터링되지 않고 주요한 기관, 오피니언 리더 혹은 매체 등의 채널에 버젓이 등장한다는 것은, 사회 전체의 지적인(intellectual) 여과 장치가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혐오"발언을 하는 것,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발언을 하는 것도 나쁘지만, 지적으로 허술한 주장을 공공연하게 퍼뜨리거나 충분히 숙고되지 않은 도덕적 잣대를 강요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다. 그것은 공론장의 성숙한 참여자로서의 시민적 의무를 방기하는 행위이다. 왜 전자에 대해서만 그토록 엄격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하는가?


약 2년 전, 류석춘 교수의 ’위안부 매춘 발언‘이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류 교수는 토론하던 학생에게 “원래 매춘이 그렇다. 궁금하면 학생이 해 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이른바 “매춘 권유 발언”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배째라"는 말이 "배를 갈라 열어보라"는 '권유'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궁금하면 학생이 해보라"는 말은 명백히 부적절한 발언일지라도 그것이 "매춘 권유 발언"이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중앙도서관을 나서다가 '매춘을 권유하는 발언이 왜 나쁜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는 대자보를 읽고 실소가 나왔던 기억이 난다. 한국 사회는 아무도 논증하는 법을 모르고, 자기 혹은 타인의 생각을 객관적인 기준에 의거하여 평가하고 정당화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회다. 사람들은 지적으로 보이고 싶어하지만 지적인 수고를 쏟기는 몹시 싫어한다. 이 사회는 지적인 차원에서는 ’어린이‘나 다름이 없다(중세 국어상의 의미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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