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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an 23. 2023

피에타

예술의 정점


네가 꼭 봤으면 좋겠어. 친구는 말했다. 로마에서 만나기로 한 우리는 괜찮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언젠가 또 다른 곳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면 로마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얼? 이제까지 뭘 듣고 있었냐는 이야기 이후에 그는 다시금 말했다. 피에타.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조각상. 사람이 좋아하는 예술을 말할 때 빛나는 눈빛이 좋다. 사실 조각에 조예가 깊지 않은데도 언젠가 한 번 생각은 했었다. 조각이야말로 세상 최고의 예술 분야라고. 그게 바로 정점이라고.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2022)


피에타를 보기 위하여 미리 조사를 하진 않았다. 정말 좋은 예술작품이란, 설명이 없어도 온전히 느껴지는 위용이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좋은 예술 작품 앞에서는 내 마음속 무언가를 깨칠 때까지 하염없이 앉아 바라보았다. 무료로 운영되는 성당 줄은 광장 앞을 한 바퀴 빙 둘러 있었다. 여길 얼마나 기다렸다가 들어가야 할까. 그리고 들어가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을까. 적당히 사람들이 빠지기를 맞춰 다시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성 베드로 성당은 바티칸의 중심에 선 성당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두 교황>에서 새로 선출될 교황을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가득 찼던 바로 그 광장이 마련된. 나는 비록 다큐멘터리긴 하지만 영화에서 나온 장소 중에 이렇게 시시한 장소는 처음이었다. 기본적으로 종교에 대한 반감이 있어 그런지 몰라도, 사람들이 종교적 공간에 의미까지 부여하여 몰려드는 꼴은 신앙의 기초를 넘어 가엾기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그런 공간 안에 함께 머물며 기다린다는 건 조금 자괴감이 들었다.



피에타, 바티칸 (2022)


죽은 꽃사슴처럼 누운 예수를 봐


친구가 목격하라고 한 명령은 오직 피에타뿐이었다. 규모가 큰 성당에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배회하는 일이 십상이다 보니 나는 적당히 사람들이 가는 곳을 따라 걸었다. 보통 유명한 곳을 먼저 가지 않을까? 내부로부터 또다시 이어진 긴 줄의 꼬리를 잇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여긴 전망대로 가는 길이에요. 아니, 그럼 피에타는 어디에 있나요?


워낙 유명하기에 사람이 없는 곳도 있을까. 피에타 앞엔 한 사람도 있지 않았다. 대성당 내부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들 맑은 날씨의 전망을 보려 승강기의 줄만 가득이었을 뿐이고 정작 성당 안은 한가했다. 나는 고요한 성당에서 곧바로 피에타를 찾을 수 있었다. 작은 빛 한 줄기를 받으며 외진 곳에 홀로 앉아 있는 성모, 그리고 그 품에 축 늘어진 예수. 홀린 듯 걸어갔다. 시야에서 석고의 형상이 점점 밝아오더니 결국 내게 커질 수 있을 만큼 커졌다.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2022)


성모는 웃는 듯 아닌 듯 오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조각상이 말을 하는 일은 없겠지만 분명 피에타 조각상은 확실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대단한 묘사였다. 옷의 구김, 근육의 형태 그리고 빛깔, 공기까지 고요해지는 분위기를 담고 있는 조각상을 보니 황홀했다. 피에타를 노래하는 다방면의 다른 예술작품이 생겨난 것도 당연했으리라.


조각이란 돌 안에 갇힌 무언가를 꺼내는 작업이라고 한다. 작품은 이미 완성되어 있으며, 조각사는 그걸 끄집어내 빚을 뿐이라고. 그래서 그 노력과 수고는 상상불가의 영역이다. 돌 안을 바라볼 수 있다면, 천의 질감마저 꺼내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수많은 괴로움에 시달렸겠지. 자신이 꺼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갖은 노력을 했을까. 정과 망치를 들고 어르며 달래는 과정은 시간 말고 해결해 줄 것이 없다. 이야말로 순수한 예술의 결정체. 나는 삶에 여러 가치가 있고 예술에도 다양한 분야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조각은 손 끝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잉태되는 예술의 정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죽었지만, 피에타로 인해 다시 세상에 드러나 숨을 쉬고 있을 것만 같다고.


고요와 정적을 깬 건 단체 관광객들이었다. 공교롭게도 한국 사람들이었다. 관광객들은 설명을 원했고, 나는 귀를 막은 채 다시 다른 것을 보기 위하여 자리를 피했다. 큰 소리로 어떤 것이 이렇고 저렇고 하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예술을 한 가지 시선으로만 책임진다는 건 얼마나 억지고 오만인가. 아직까지 설명을 듣거나 보지 않은 내게 피에타는 피에타일 뿐이다.








@b__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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