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하 Nov 27. 2023

소심한 이불킥

영화 <서울의 봄>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력다툼을 하는 정치인들의 이미지는 익숙하다. 서로의 권력 배분에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려 난투를 벌이는 자들의 행태에 지쳐 눈을 돌린 이들도 상당수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최고 권력의 경우 그 강도가 더 세다. 눈먼 것으로 만들어 제 주머니를 채우기 용이한 자리에 올랐을 때 인간이 얼마나 악독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여느 나라가 그렇듯 한국의 민주화도 국민의 엄청난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그 역사의 길이는 짧디 짧아 자주 회고되곤 하는데 이 영화도 손익을 따졌을 때,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주제 선정이라 일컬을 수 있다.


한국의 다사다난한 역사 특성상 가장 극적인 지점을 추려보면 대개 ‘국민이 짓밟힌’ 경우가 대다수로, 해당 영화는 박정희의 사망 후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으로 이어지는 시점을 그렸다. 직접적인 무력충돌이나 시민의 반발 없이 어떻게 반란이 성공할 수 있었는가?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반란은 성공했으며 전두환은 명목 상 대통령 직을 수행했으며 노태우를 자신의 다음으로 앉히는 등 이미 지나온 역사가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대중은 그저 불합리한 정권의 이양까지로만 알고 있게 된 거다. 영화에서도 감독은 상상을 덧붙인 각색이라 하였으니 100퍼센트 정확한 그날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던 당사자뿐만이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는 정보의 통제, 기밀로 분류된 역사를 낱낱이 알 필요가 있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그날의 역사를 톺아보며 어느 정도는 양념이 가미되었을 영화를 통해 말이다.



인간은 강력한 리더가 자신을 이끌어 주길 원한다.


극에서는 전두광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나 전두환을 알아채지 못할 이는 없다. 전두광이 말하는 대사의 리더는 ‘지배’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박정희가 사망했고 본인이 죽기까지 은닉재산을 축적하는 것에 온 생을 허비한 자로서 우매한 대중을 지배할 권리가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뜻과도 같다. 반면 가상인물인 이태신이 갖는 리더십은 영화의 초반부터 후반까지 ‘책임’이라는 자세를 올곧게 견지하는 사람의 표본이다. 그렇기에 무능한 육군본부 측 사람들과도 대비되며 반란군 측 무리와도 반대되는 영웅적 서사에 필요한 인물이다. 모티브가 된 사람도 인터넷에 떠돌고 있지만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극 중 인물 자체의 요소는 차이가 크다. 되려 해당 상황에 반드시 필요했던 인물이 아닐까.


군국주의의 야망은 전두광이 불을 지핀 것처럼 묘사되었으나 반란군 조직을 이룬 ‘하나회’ 인물 전체가 그럴 것이다. 사활을 거는지 말지는 고민했겠지만 그들은 군벌 내에서 사조직을 만들었을 만큼 군부가 더 큰 힘을 갖길 원한 인물들이다. 혼자서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력들이 있다 보니 모두가 보탤 수 있을 만큼만 모아도 큰 힘을 가질 수 있는 무리를 만든 셈이다.



대한민국 사회의 척도 <하나회>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 아래 보수적 계급도를 탈피하고자 만든 거라면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군 내 사조직이 결집했을 때의 무서운 점은 편 가르기가 쉽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군은 명실상부 무력집단이다. 하나회 소속 장교들은 보안사령관인 전두광을 필두로 모든 정보를 장악했다. 정보라는 매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악독하고 영리한 자다. 시대의 특성 탓에 쉽게 조립되지 않았던 국민의 의지가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모든 통신망을 감청할 수 있는 데다 학연과 지연까지 동원하여 지휘부에 영향을 끼치는 것. 계급을 탈피한 조직 문화와 계급을 이용한 병력의 장악. 전략적으로 훌륭한 방식이다.


실제로 군벌은 겉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보수적인 집단이다. 한국의 남성이라면 가야만 하는 군 생활에서도 느낄 수 있으며 학군단 출신과 육사 출신의 진급 여부도 유의미하게 다르다. 교육적 질로만 따져보았을 때 정석적인 훈련을 거쳐온 자들이 보내는 텃세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보자면 자기 후배 챙겨주기가 팽배한 집단이란 소리다. 유능한 사람, 아양을 잘 떠는 사람보다 앞서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1순위다. 어쩐지 현재 한국 사회의 축소판과 비슷하지 않은가.


개국공신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전두환은 사후에도 자신의 재산과 영향력과 역사적 평가가 되도록 뒤집히지 않게끔 주변인을 포섭하는 데 애를 썼다. 영화에서 전두광이 반란군들에게 콩고물을 배가 터지게 입에 처넣어 줄 것이라는 대사를 하는데 이는 쉰소리가 아니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밑을 견제했던 박정희와 다른 행보다. 전두환은 비호를 받으며 그저 늙어 죽었다. 늙어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 말이다. 여기에 과반의 의견으로 이행하는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쳐 죽일 놈’이라는 소리가 부지기수로 들려도 움직이지 않는 건, 콩고물이 그득하게 퍼져서다.




쳐 죽일 놈

여전히 분노는 냉소보다 낫다. 난쏘공의 조세희 작가가 말했듯 냉소하지 말고 분노하는 게 옳다. 냉소는 어떤 변화도 이끌어내지 않으니까. 영화가 소화불량 같은 내용을 무려 140분이나 풀어냄에도 이게 우리의 역사라는 것에 얼굴이 붉어질 뿐이다. 부정한 것들을 도려내는 것에 화를 쏟는 게 어차피 바뀌지 않는다는 방관보다 무거운 저울질이다.


영화는 성공했다. 곱게 죽지 말아야 할 인간을 뒤늦게나마 부관참시하는 것에 대하여 말이다. 이 영화가 조금 더 일찍 나왔다면 곱게 죽지 못했을까. 아니라면 모든 은닉 재산을 몰수하고 깡통 찬 말년을 초래하게 할 수 있었을까. 감독이 시사하는 소심한 복수는 적어도 관객의 분노에 불씨를 지폈다. 애석하게도 들불로 번질 것 같진 않다. 그의 자손들과 반란군의 모든 가족들은 떵떵거리며 활개 치겠지. 국고 환수를 외치더라도 뜯어고칠 게 너무 많은 이상 <서울의 봄>은 너무 늦은 분노다. 시쳇말로 이불킥 정도의 영향이다.


대중이 분노하는 지점은 정확히 ‘저따위 허술한 전략’에 당한 당시 시대상이었다. 중간에 반란군 무리에서부터 균열이 일어날 만큼 그들은 치밀하지 못했다. 플랜 B 따위는 없이 되는대로 응대한 일이 모두 운 좋게 맞아떨어져서 나라를 손에 쥐었다.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단연코 정보의 부재가 빚은 결과에 원통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이었다면 결코 당하지 않았을 역사. 그리고 역사 앞에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그럼 실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금의 해결방식이다. 그리고 해결에 대한 논의는 전무하다.



이 영화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바로 세우진 않고 있다. 그저 국방장관을 비롯한 수뇌부의 무능함으로 저런 모자란 시정잡배들의 주먹구구 전략으로 나라가 넘어갔다는 게 한심할 따름이다. 영웅 서사로 만들어진 이태신조차 독재를 물리친 민주사회 구현을 위해 움직이기보다 삐걱이는 기계적 군인 신념으로 곱게 뭉쳐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행주대교에서 2 공수가 두 번이나 돌아가는 장면을 이태신이 단신으로 막는 장면을 보며 유명한 천안문 탱크 사진이 떠올랐고(물론 감독이 의도한 바였겠지만) 유치함에 살짝 웃고 말았다. 물론 군인에게 정치적 의견은 필요 없는 감정이나, 반란군이 집어삼킬 목표가 뚜렷한 이상 신파를 넣지 않고는 못 배긴 게 아닌가.


이를 빌미로 제5 공화국을 비판하는 작품이 하나 더 늘었다. 시간 상으로는 <그때 그 사람들>, <서울의 봄>, <화려한 휴가>, <변호인>이 되겠다. 이 세 편을 보면 민주화가 유린당하는 과정을 목도할 수 있다. 앞으로 영화사에 전두환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더 이야기할 것은 없겠다. 아마도 전두환 관련 영화가 더 나온다면 그를 얌전히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암약하는 정의의 사도 정도가 나오면 안 될까. 생각해 보니 <26년>이라는 작품이 비슷한 내용이다. 첫사랑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모두가 전두환을 놓지 못하는데 왜 정치판과 권력을 지닌 어느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않는 걸까? 설마. 그리고 어쩌면.







@b__aka


매거진의 이전글 광기라는 역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