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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제의 딸 May 21. 2020

막내 짓

01. 원치 않은 것을 강요받았던 기억

어떤 집단이든 각자의 롤(역할)이 있다.

자신을 낮추면서 분위기를 한층 더 밝고, 친밀하게 만드는 사람과 과묵한, 전형적인 리스닝형 사람, 모든 이야기에 반응하며, 리액션에 능한 사람 그리고 모든 것에 반(反)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 등 제각각 자기의 롤을 충실히 이행하며, 집단을 구축한다.


나는 대학교도 늦게 입학하고, 집에서도 장녀라 그런지 이 수많은 것 중 특히 ‘막내’라는 롤이 참 어려웠다. 막내는 무릇 ‘막내 짓’을 잘해야 하니까.


상업 영화 현장 실습 기간 때의 일이다. 사극 영화 연출부 중 스크립터로 들어간 나. 나이가 지긋하신 감독님 밑으로, 연출부는 부감독(색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조감독 둘 그리고 퍼스트와 세컨드 둘, 써드 한 명과 스크립터인 나로 구성되었다. 나와 조감독 한 분을 제외한 모든 성별은 남성이었고(성별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이는 내가 제일 어렸다. 회사 생활은 모든 것이 처음이라 불안하고 어려웠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배워가는 만족감이 있었다.


막내는 이런 것들을 눈치껏 잘해야 했다.

대답은 무조건 3명 이상 들을 수 있도록 크게 하기, 행동은 빠르게, 식사 시간에 밥은 빠르게 먹기(연출부 선배들 속도에 못 미쳐 늘 남기기 일쑤였지만, 나날이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차로 이동 중에는 절대 잠들면 안 되고, 같이 내비게이션으로 동선을 확인하기, 회식 자리에서 연출부는 술을 잘 마셔야 하며, 취해도 안 됐고, 못 마셔도 안된다. 또 눈치껏 맞장구치기와 나이 많은 사람에게 농담으로 오빠라는 소리도(혀 깨물고) 해야 하고, 회식 후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조감독을 택시에 태워 보낸 후, 택시 번호를 기억하기와 집에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기 등.


다른 집단의 막내 여러분. 아니라고요? 아, 미안합니다.

물론 내가 이 역할을 완벽히 잘 수행했다는 게 아니다. 겪어보니, 이런 일들을 잘했으면 좋았을 걸, 이라는 아쉬움이 남았을 뿐.


사회생활은 이런 것이구나, 를 깨닫는 즈음. 연출부는 제작부, 미술부와 함께 회식자리를 갖게 되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볼 빨간 여자 조감독. 나에게 말을 건넸다.

“네가 xx 생이지?”

옆 테이블의 여자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xx 씨랑 동갑이네?”

아, 그렇구나. 이전 회식 자리에서 띠동갑 제작부 실장님에게 오빠란 소리를 잘도 해대던, 저 친구는 참 막내 짓을 잘해, 내가 은근한 부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린 눈이 마주쳤다. 서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조감독이 나에게 한마디 했다.

 “야! 너 xx 씨가 어디 학교인지 알아? S 대야 S 대! 존댓말 하지 못해?!”

아. S 대 나온, 고학력에 막내 짓도 잘하는 xx 씨를 내가 감히 몰라봤구나. 급하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다시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xx 씨.


아아 자존심 상해. 그래. 지방대에 막내 짓도 못하는 내가 존댓말을 하는 건 당연하지 뭐.

그 순간, 나는 조감독에 대한 약간의 반항심과 미술부 xx 씨에 대한 약간의 미움, 그리고 나 자신을 미워하는 엄청난 마음이 교차했다.

고학력이 아니어도, 막내 짓을 잘하지 못해도, 자신을 미워할 이유는 전혀 없는데 말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사회생활이 쌓여, 막내가 아니어도, 막내 짓을 잘한다.

막내가 되고 싶어 발버둥 쳐도, 될 수 없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는 법.

그때, 그 롤이 주어졌을 때, 오롯이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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