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원치 않은 것을 강요받은 기억
우리나라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00년 1.47명, 2010년 1.23명으로 지극히 낮은 수준을 유지하여, 현재 우리나라는 ‘초 저출산’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그러는 와중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세상에 갓 나온 아이들에게 ‘착함’을 강요하고 있다.
친구의 첫 아이가 태어났다. 단톡 방은 요란했다. 뽀얀 아이 사진이 여러 장 나열됐다. 아아, 뼛속까지 맑아지는 이 기분. 친구들은 출산한 친구에게 고생했다는 갖가지 말과 덕담을 하기 시작했다. ‘착하고 바르게 잘 자랄 거야.’ 나는 휴대폰 액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메시지를 치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대학교 시절, 영화과였던 나와 동기들은 항상 워크숍으로 정신이 없었다. 이 워크숍이라 함은 갖가지 아이디어로 팀원들과 피 터지는 회의 끝에 단편 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떤 작은 씨앗이 발아하여 큰 꽃이 될 수도, 열매가 될 수도 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라, 우선 이 작은 아이디어를 잘 다루는 것이 관건이었다. 다행히 지난 학기부터 준비해온 아이디어가 다음 학기에 잘 진행되어, 다른 팀들보다 여유 있게 후반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짬짬이 긴 전화통화를 하며, 기분전환을 할 여유도 있었다. 친한 동기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가볍게 아이디어 얘기를 던지는 나. 대단하지 않은 이야기다. 얼마 전 내가 이런 생각을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발전시키면 재미있지 않겠냐는 둥, 여기서 나는 어떤 것을 느꼈는데, 나는 이런 것을 표현하고 싶다는 둥, 이러다 칸 가는 거 아니냐는 둥, 이러다 상 받는 거 아니냐는 둥 정말 별다를 것 없는 대화였다.
몇 주 뒤, 과방에서 편집 중인 그 동기의 단편 영화를 보았다. 아 익숙한 이 스토리. 내가 말한 별거 없던 그 스토리.
얼마 전 일이다. 화요일, 목요일마다 브런치에 에세이를 업로드하는 나.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자기만족에 차오른 나. 이 소식을 들은 그때 그 동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동기는 영화 기획 공모전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리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우리. 최근 겪었던 이런저런 사건들을 재미있게 나누다, 내가 던진 한 마디를 계속해서 곱씹더니 갑자기 메모를 하겠다는 그 동기. 아아 제발. 주여.
며칠 뒤, 다른 동기에게서 그 동기의 영화 공모전 당선 소식을 들었다. 그 동기의 대략적인 영화 스토리를 듣게 된 나. 아 익숙한 이 스토리.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내가 명확하게 내 아이디어라고 말하지 못한 것은 그 동기와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나 사이에 연결되어있는 수많은 연결고리들은 또 어떡하며, 쿨한 언니에서 쫌생이로 변할 순 없었으니까.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내 감정에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그 동기에게 우유부단하게 착한 사람으로 남으려, 명확하게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겠지, 뭐.
메시지를 치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다시 자판을 누르는 나.
'착하게 자라긴 개뿔! 그냥 멋대로 크게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