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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Apr 20. 2024

의사가 사회와 불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2024.4.10 

4월 10일 투표날, 아침입니다. 저는 주말에 사전투표를 했습니다. 다행히 주말도 투표일도 당직은 아닙니다. 4월부터는 우리 과 교수들이 지친 나머지 주말에는 당직이 독박 쓰는 대신 나머지는 출근하지 말자고 합의를 하였으니 오늘은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까지는 매일 출근했습니다. 돌아보니 지난 설 연휴 이후로 하루도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오늘 임종할 것 같은 환자 얼굴이 눈에 밟힙니다. 4기암으로 진단된 이후에도 5년동안 치료하며 잘 지내오던 분이신데, 막판에 잠잠하던 암 덩어리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지며 각종 합병증이 생기는 것을 끝내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환자 옆을 지키고 위로하는 것 또한 의료인의 일입니다. 오늘이 이분을 뵙는 것이 마지막이 될 지 몰라, 출근을 하긴 해야겠네요. 

내 몸이 힘들 때는 환자가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외래진료를 하다보면 길게 남은 대기명단을 노려보며 마치 전투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적들을 하나하나 처리(!) 해나가는 듯한… 당직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계속 쌓여가는 콜은 내가 처리해야 할 하나의 증상, 검사수치, 생체징후이지 환자라는 한 인간으로 보기 어렵지요. 그건 어떤 면으로 봐선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몸을 수치화하고 계량하여 대응하는 현대의학은 어떻게 보면 비인간적이지만 결국 인간이 가장 원하는 회복과 치유를 얻어낸 힘이니까요. 한 의사가 가능한 한 많은 환자를 볼 수 있는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료의 모순은 어쩌면 그러한 현대의학의 장점을 극단까지 밀어부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돌아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외래진료실에서는 환자 한 명에 3분을 쓰기도 어렵지만, 제가 딱히 더 처방할 수 있는 약물이나 시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명을 보러 휴일에도 출근을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요. 


선거의 결과가 어떻더라도 아마 지금의 상황은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동안 벌어진 두 번의 의료공백이 어떤 여파를 만들어낼 지도 걱정됩니다. 국가와 사회는 가능하면 적은 비용으로 고품질의 의료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든 의사 집단을 통제하고 싶어하지만, 과학과 훈련으로 무장한 의사라는 고도화된 전문직 집단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도덕적 비난이나 법적 구속력도 의사 개개인이 가진 시민권을 박탈하면서 그들을 옭아맬 수는 없으니, 이러한 의료공백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의사와 사회가 서로에게 신뢰를 가질 수 없는 한은요. 다만 그 신뢰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누가  만들어가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회진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러 의국사무실에 가보니 “젊은 의사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라는 문구가 박힌 뱃지가 여러 개 탁자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가운에 달고 진료를 하라는 교수비대위 측의 요청입니다. 저는 쉽게 그 뱃지를 달지 못합니다.  오늘자 한국일보에 실린 칼럼 <전공의 박단과 하청노동자 유최안>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사회적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는 건 좋은 일이다. 동료 시민들의 부당한 노동자 힐난도, 징벌적 손배 폭탄도 없는 나라가 좋은 나라다. 그러나 싸우는 노동자 대우가 왜 공평하지 않고 일관성이 없는지는 따져 봐야 한다. 조선소 하청노동자 유최안을 기억하는가. 하청 처우를 개선하라며 2022년 파업한 그는 대통령을 만나 호소할 기회를 감히 얻지 못해 가로·세로·높이 1m 크기의 철제구조물에 들어가 출입구를 스스로 용접해 막고 31일을 버텨내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박단들의 목소리만큼 유최안들의 목소리가 크고 또렷하게 들리는 나라를 위해 오늘 투표를 잘하겠다는 말로 글을 맺고 싶지만 어느 정당을 둘러봐도 암담하기만 하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약자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 의사들의 탓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통령까지 면담하고 와서 “목소리를 들어달라”며 환자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게면쩍습니다. 의사단체 내부에서의 자중지란도 난감한 일입니다. 회색분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요. 어쨌든 의사들의 목소리가 잘 안들리는 것은 그 소리가 작아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의사들은 의료공백이라는 강력한 수단을 통해 누구보다도 소리 높게 외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환자들이 더 많은 의사를 원하는 이유는 가속화하는 고령화사회와 지역 공동화 현상 속에서 어디서나 더 안전하고 더 접근성 높은 의료를 원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을 위해 의사 사회가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모습은 사실 이제까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저  정부 때문에 의료가 망해간다고 탄식만 했을 뿐입니다. 저도 그들 중 하나이구요. 

한 명의 환자를 위해 출근한 것으로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당직을 섰다고 그 때 나는 최선을 다했노라 자족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이런 의료붕괴의 위기를 겪고도 얻은 것이 없다면 불행한 일이지요. 회색분자의 고민은 20년이 넘도록 지속되어 왔지만 이젠 더 이상 의사가 사회와 불화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그것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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