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정된 미래에 대비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당직입니다. 오늘은 병동담당이구요. 응급실 당직은 다음주에 합니다. 종양내과는 응급실 콜이 많은 소위 '배후진료과' 중 하나이죠. 요즘은 '배후진료'라는 말도 언론에 자주 나와서 많이들 아시더군요. 제가 근무하는 병원은 큰 병원이지만 소위 '권역응급의료센터'가 아니어서 외상이나 심정지 등 전형적인 응급질환보다는 원래 치료를 받던 만성질환환자들이 오는 비중이 더 큽니다. 그중 많은 수는 항암치료를 받는 암환자들이지요. 제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종양내과는 소화기내과 다음으로 응급실 호출이 많은 과입니다. 암의 진행으로 대장이 막혀 변이 안나오는 분, 황달이 생긴 분, 피가 나는 분, 열이 나는 분들이 종종 응급실을 찾습니다.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인해 구토나 설사가 나는 분들도 자주 옵니다.
응급실 당직을 서는 날이면 다른 병원에서 직접 연락이 오곤 합니다. 대부분 "너희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인데 응급처치는 하였으니 전원할 수 있는지"를 문의하는 연락입니다.
요즘 배후진료가 어려우니 환자를 받기 어렵다고 응급실에서 거절하여 환자와 구급대원들의 고충이 크다는 뉴스가 자주 나오지요. 배후진료가 안되면 이런 전화를 의사가 돌리고 앉아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응급실 의사들이 '차라리 환자만 보면 괜찮은데 전원 병원을 알아봐야 하는 것이 제일 고통스럽다'고 호소하곤 합니다. 일단 병원에서 환자가 진료를 받으면 119는 손을 뗍니다. 배후 진료를 위해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은 진료한 의사의 책임이고, 또한 병원 간 이송은 119가 해주지 않습니다. 환자가 사설 앰뷸런스를 돈을 내고 이용해야 하죠. 이 과정에서 환자의 불만까지 응급실 의료진이 들어야 하므로, “전원없이 우리병원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좀처럼 환자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일종의 "폭탄돌리기"입니다. 즉 폭탄을 처음부터 받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되어버렸습니다.
환자 입장에서는, 그리고 전원을 하는 병원의 입장에서도 항암치료를 받던 병원에 가서 마저 치료를 받는 것이 일견 타당해보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감당이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의정사태 이전엔 병상이 없었고, 지금은 의사가 없습니다. 의정사태 이전에는 종양내과는 약 200병상 정도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약 100병상을 겨우 유지하고 있습니다. 시술이나 수술 등 다른 병원에서 하기 어려운 치료를 요하거나 매우 중증이라 전원 자체가 어려운 환자들을 제외하면 환자를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한번 전원된 환자는 다시 전원하기 어렵습니다. 즉 환자 스스로 또는 119를 타고 온 환자는 전원할 수 있지만, 다른 병원에서 전원된 환자를 다시 제 3의 병원로 전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퇴원시키던지, 입원시키던지 두 가지 선택의 여지만 있을 따름입니다. 대체로는 퇴원하기 어려운 환자들이므로 확실히 입원시킬 수 있는 경우에만 전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전원요청은 거절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전공의 복귀를 위해 정치권이 나서고 있지만 논의는 지지부진합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전공의들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사회에서 모든 결정은 이해관계가 맞아야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전공의들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어떻게 되던 지금 들어올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환자들의 고통, 전문가의 양심, 이런 것들을 들어가며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무용지물입니다. 저 역시 당직까지 서가며 일하는 원동력의 주요부분은 희생, 박애정신 이런게 아니라 월급, 교수라는 직업의 명예와 안정성, 승진과 커리어 유지를 위한 근무기간, 이런 것들이니까요.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의사로서의 삶이라는 요리의 주 재료가 아니라 양념입니다. 양념없는 요리는 먹기 힘들겠죠. 양념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양념만으로 요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전공의들은 지금 들어와도 수련기간이 반 년이 채 안됩니다. 이것이 일년의 수련기간으로 인정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원래의 수련기간의 반만 채우느니 차라리 내년에 새로 시작하기를 선호할 것입니다. 내과전공의는 그러지 않아도 3년으로 단축되어 교육과정이 빡빡한데, 특히 원래대로라면 내년에 전문의가 되는 예비 3년차들의 경우 3년차 때 배우는 고난도 시술 (내시경, 초음파 등)을 익힐 기회를 잃고 얼렁뚱땅 전문의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테니까요. 이것은 그들의 요구대로 2025년 의대정원증원이 백지화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상황이라, 설령 소위 '7대요구안'이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그들은 빨라야 내년 3월에 복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도 지금 정치권은 2026년 정원을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물론 2026년 정원조차도 조정이 되지 않는다면 전공의들은 내년에도 돌아오지 않겠죠... 26년 정원 논의는 필요하지만 당장의 해결책은 안된다는 말입니다.
안되는 것을 두고 안달복달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은 다 아시지 않나요? 저출산이 문제라고 떠들어도 이미 인구절벽은 확정된 미래입니다. 그러느니 급격히 진행되는 고령화사회에 우리가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를 논의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출산과 육아를 마음놓고 할 수 있는 사회가 어떤 것인가, 그것을 위해 어떤 이해관계를 조정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전공의들이 돌아오지 않고 의대 교육이 1년 미뤄지며 내년에 신규 의사와 신규 전문의가 배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정된 미래로 놓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누가 잘못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물론 철저히 따져야 하나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도 없어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2025년 1,500여명의 신규 의대생을 선발한다는 것에 반대하나 현실적으로는 확정된 미래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의사집단 이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의사집단 말고는 아무도 그 이후를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단은 겨울을 부족한 의료인력으로 어떻게 날 수 있을 것인지 먼저 생각해야하겠죠. 일반인들, 특히 환자들 입장에서는 가급적 일상생활에서 조심하고, 특히 호흡기감염이 기승을 부리는 계절에 대비해 각종 백신 (폐렴구균, 대상포진, 인플루엔자, 그리고 새로 나올 코로나 백신까지)을 미리 맞는 것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평소 자신의 건강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는 주치의를 만들어놓는 것이 또한 도움이 됩니다. 응급실에 가게 될 수 있는 건강문제를 악화되기 전에 발견하여 조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근 가정의학과 또는 내과의원을 여러군데 말고 한 군데 지정해서 꾸준히 진료를 받으세요.
항암치료를 하는 저의 입장에서 대처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당장 위험할 수 있는 치료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존률을 높여주더라도 당장의 위험이 클 수 있는 치료는 과감히 접게 될 것입니다. 마치 코로나 판데믹 시절과 마찬가지로요. 말기암 환자가 원하더라도 이득이 적은 항암치료는 가급적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 유급된 의대생까지 7,500명을 교육하여야 할 의대에서는.... 일단 예과생들은 타 단과대학에서 이수가능한 교양과목이나 기초과학 위주로 가르치면서 현실적으로 진급기준을 교육여건에 맞추어 강화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졸업한 의대에서는 예과 학점 중 F가 없고 일정 학점 이상 채워야 본과 진급이 가능했는데, 당시엔 대부분 90% 이상 학생들이 달성할 수 있었던 기준이었죠. 만약 이것을 평균 학점 3.5 이상으로 올린다던지, 이런 식으로 의학교육의 여건에 맞추어서 의대 내에서 학생수를 조절하는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제2의 입시판이 의대 내에서 벌어질 지도 모르는데.... 최대 피해자가 될 24학번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은 아마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이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