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고 고른 말 - 홍인혜
카피라이터들은 스스로 말을
가지고 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말을 가지고 논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공돌이인 나는 그렇게 놀아본 적이 없어
낯설고 신기하다.
결국 하나의 말을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고 하는 건가?
하지만 말을 가지고 논다는 것이
부정적이거나 너무 상업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말의 재발견,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본 광고쟁이들의 책들은
그런 맛들이 있는 것 같다.
같은 말도 식상한 말도
긍정적으로 해석해서 새롭게 쓰기.
그게 ‘고르고 고른 말’ 이 책의 좋은 점인 것 같다.
1.
환경이 바뀌면 쓰는 말도 달라진다.
대학생이 되면 듣는 새내기란 말도 그렇다.
새내기란 말은 고 백기완 선생이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선배들이 새내기라고 부를 때는 귀엽고 사랑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일거다.
난 새내기의 반대말을
헌내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복학생이라고 생각했다.(나만 그런가 ㅎ)
작가는 “우리는 헌내기가 아니라 정든 내기"라고 말한 선배를 통해 인식이 변화됐다고 말한다.
헌내기는 오래됐다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이고,
‘정든 내기’는 긍정적 감정을 투사해서 묘사한 것 같다.
이렇게만 말해도 마음가짐과 상황이 바뀐다.
누구는 정신승리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게 말의 힘 같다.
2.
사주팔자를 본적도 믿은 적도 없다.
출생 시가 같으면 팔자도 같다는 말인가?
의심만 했다.
아마 결혼할 때 와이프 친정 쪽에서
궁합을 본 것 같다.
괜찮다 정도로만 들었다.
운명을 믿지는 않지만
인생을 살면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닥치게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운명이라고 정의한다면
그게 운명인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운명이고
사주팔자라 생각만 해도
정말 힘들 때 위로가 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힘든 건 당신의 사주가 너무 맑아서입니다.”
또한 내 성격과 기질은 타고난 것이 많다.
타고난 성격과 기질이 운명과 팔자라면
이건 바꾸기 힘들겠구나 하고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스토아 철학자 에펙테토스는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렸고,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어떤 것들이
운명과 팔자라면
어쩔 수 없는 것에 고민하고 불안해해 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보다
어쩔 수 있는 것에 신경 쓰는 게 좋다.
운명과 사주팔자를 작가는 나를 다른 프레임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말한다.
“평생을 쥐고 살아
속속들이 아는 ‘나'라는 존재를
다른 프레임에서 바라보기 위해,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이 기운을 덧입혀 해석하기 위해"
3.
“부정적인 정서를 드러내기를 이토록 어려워할까,
내가 내 감정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나는
실은 자신이 없어 화를 누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나와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일단 참는다.
그리고 후회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화를 냈어야 했는데.
화도 내본 사람이 낸다고,
화를 낸 다음에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화를 내서 득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부분 맞지만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내 감정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화를 내는 방법을 잘 모르고,
화를 낸 다음에 어떻게 풀어야 할지 두렵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심지어 나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옆에 둘 필요는 없는 데 말이다.
4.
“인간도 결국 일종의 기계 장치구나"
“그동안 내 기분, 정서, 감정이라 여겼던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특정 화학물질이 이끌어낸 하나의 작용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인간 활동의 대부분이
무의식이나 습관적으로 이루어진다.
감정이나 기분 같은 것들도
대부분 감각에서 나오는
호르몬 작용의 일부다.
우울증 약만 먹어도 평온해지는 이유다.
그러니 이걸 정신이나 생각,
마음의 문제로 생각하면
해결이 어렵다.
기분이 우울할 때, 감정이 상할 때
정신을 가다듬는 게 아니라
몸을 움직이고, 감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5.
“모든 사람은 본인을 입체적으로 인식한다"
“나는 다차원의 부산물이고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존재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다.
그 고차원의 존재가 명랑, 행복, 대범 같은
단어 한두 개로 규정될 리 만무하다”
문제는 나는 다차원적이고 입체적인데
남은 일차원적이고 평면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다.
왜 그럴까?
생각하기 귀찮아서, 어려워서
내가 입체적인 만큼 남도 그런데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그게 아니면 나를 너무 높게 봐서,
아니면 나만큼 남을 잘 알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결론은
남을 너무 빨리 판단하면 안 된다.
판단은 유보할수록 좋다.
알랭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에서
불안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재정의 하는 것이라 했다.
말과 글에는 그런 힘이 있다.
내 안의 불안과 부정적인 생각들을
다르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숙고와 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고르고 고른 말과 글을 쓸 수 있게
성숙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