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네아 Mar 18. 2018

날씨를 낭비하기 싫던 어느 날

걷기 좋은 길 걸어보기

드디어 길고 길었던 겨울이 끝났다. 햇빛은 점점 높이 떠오르면서 겨울철만큼 내 창가에 오래 머물러주지 않았다. 대신 따뜻한 공기와 선선한 바람이 나를 밖으로 유인했다. 참 오랜만에 산책이라는 것을 하고 싶어 졌다.

예전에는 걷고 싶을 때 집 근처에서 무작정 걸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취업 준비생이었을 때는 가끔 헬스장에 가기 싫어서 운동 때우기 용으로 걸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몇 정거장 안 떨어진 번화가에 일이 있을 때 걸어 다니고는 했다. 그러다가 내 몸에 필요한 건 걷기보다는 근력운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홈트레이닝을 시작하면서 상대적으로 걷기는 점점 잊혀 갔다. 게다가 미세먼지가 화두가 되면서 특히 8~10차선 도로가 있는 집 근처에서는 별로 걷고 싶지 않았다.


다시 걷고 싶어 졌지만 실제로 떠나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아무 곳에서나 걷고 싶지 않았으므로 적합한 장소 검색에서부터 걷기에 너무 춥지 않고 맑은 날씨, 미세먼지 지수 등을 맞추느라 원래 계획보다 2주 정도 늦게 산책을 나갔다. 산책 장소로 선정된 곳은 부산에 있는 이기대 해안산책로였다. 부산 생활을 시작하면서 현지인들이 이곳저곳 가보라고 조언해준 장소 중 하나였다. 다만 달맞이길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평소에 관심이 조금 덜했던 곳이다.

갈맷길 입구에 도착하면 약간 에메랄드빛을 띠는 바다와 부산의 대표 랜드마크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각 랜드마크 별 이름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지도가 나온다. 해운대와 달맞이고개와 동백섬과 마린시티가 이렇게 일직선 상에 있었다니 새삼 새롭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는데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도보보다는 등산에 가까운 코스였고 정비되지 않은 길이 있어서 조금 당황했다. 적당히 걷고 가려고 해도 교통이 애매해서 차라리 오륙도까지 가야 마을버스라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륙도가 보일 때까지 쭉쭉 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갈맷길 2-2코스를 완주한 것이었다.

숨이 차도록 걷고 생각을 비우는 것이 목표였으나,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했고 숨이 차게 걷기보다는 근육에 힘을 주면서 이동해야 했다. 약간 후회가 되었지만 잠깐 숨을 돌리면서 수평선을 바라본 순간 갑자기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해수욕장도 아닌데 바다를 옆에 끼고, 그것도 살짝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걷는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오륙도에 도착한 순간 바다가 너무 파랗고 눈부시게 보이면서 약간 지친 몸에 뿌듯함이 맴돌기 시작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돌아다니기 싫어할 것이라는 오해를 가끔 받는다. 나만의 공간에서 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건 맞지만, 이렇게 걷기 좋은 날이라면 길 위에서도 힘을 얻을 수 있다. 뒤를 돌아봤는데 파도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길을 걸으면 절대적인 고독에 맞부딪치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에너지를 받게 되기도 한다. 다음에는 어느 길 위에서 어떤 느낌과 에너지를 받을지, 계획 좀 짜 봐야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삶의 질을 높여 왔던 물건들의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