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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Apr 02. 2023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 있는 걸까요?

내가 만난 첫 어른


작은 마케팅 회사에 다녔다. 직원들은 대개 내 또래였고, 대부분은 사회 초년생이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알바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잠깐 휴학을 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사무직이었고, 우선 이력서에 쓰기 나쁘지 않아 보였으니까.


그렇지만 일은 체계가 없었고, 엉성했다. 저 먼 끝자리에 앉아 있던 팀장이라는 사람이 딱 첫 하루만 일을 알려줬다. 일은 단순했다. 과자 봉투 접는 법, 무슨 라면 리뷰, 무슨 피자 후기. 사람이 많이 볼법한 주제들에 대해 단어만 바꾸어 글을 찍어내는 일이었다. 그 글이 포털 검색 1페이지에 걸려 블로그 방문자 수가 많아지면? 목표 달성.


그렇게 몇 주 정도를 운영한 뒤 방문자 수가 많아지면 블로그는 이름을 바꿨다. 무슨 비뇨기과, 무슨 산부인과의 공식 블로그랜다. 전문 의학 지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십 대들이 무슨 무슨 수술이 굉장히 안전하고, 문제가 없다고 글을 적었고, 그럼 이내 다른 아이디로 바꾸어와 대단한 정보를 얻고 간다는 듯한 댓글을 적었다.


며칠에 한 번씩 대표라는 사람이 와서 누구의 블로그가 가장 방문자가 많았고, 누구의 글이 검색 상단에 있었는지 보고를 받고 가곤 했다. 그런 대표가 없을 때면, 팀장이 최고 책임자였으며, 또 가장 직급이 높은 상사였다. 뭐든 그의 컨펌이 필요했으며, 그는 뭐든 허락해주었다.



이건 제 탓이 아닌데요


왜겠어. 생각하기 귀찮았거든. 그는 그리 유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주 일을 미뤘고, 가끔은 중요한 결정 사항도 내게 물어 정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그가 팀장인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나이가 제일 많고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가끔 그가 못미더웠지만, 우리들은 팀장이라는 이유로 그를 믿고 따랐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한 직원이 만들었던 콘텐츠 일부가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삭제되었고, 머지않아 블로그가 검색 결과에 나타나지 않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두 번, 세 번씩 반복되기 시작했고, 대표는 그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유를 물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탓’이었다.


아니 제가 분명 애들한테 그렇게 올리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이런 거 하면 큰일 난다고 얘기했는데. 대표실 근처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기가 찼다. 그는 가장 그의 책임이 필요한 순간에도 그것으로부터 온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대신 그 책임은, 부하 직원들에게 돌아갔다. 팀장의 허락 없이 업무를 진행했다는 이유로 몇 명이 해고되었고, 그 자리는 다른 이들로 채워졌다. 기가 찬 일이었다.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렇게 책임질 줄을 모르다니. 그는 이윽고 내게 가장 닮고 싶지 않은 어른으로 남게 되었다.



어른, 책임의 다른 이름


그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 건, 수년이 지난 후였다. 친구의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그건 너무 어른스럽지 못해.” 내가 말했다. “어른스러운 게 뭐라고 생각하는데? 너는 네가 어른스럽다고 생각해?” 많은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가장 먼저 그리게 된 얼굴. 뻔하지, 뭐. “일단은, 책임질 줄 아는 사람.”


그렇다. 책임은 어른이라는 단어 뒤에 가장 먼저 붙는 두 글자다.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은 어른이 아니다. 법적으로도, 성년과 미성년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책임이다. 책임을 질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법은, 성년이 되면 그런 능력이 생긴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어른스러움’에는 능력이 중요한 게 아니다. 책임을 지려는 시늉이라도 하느냐, 아니냐. 물론


말이 쉽다. 무엇인가에 책임을 진다는 게 그리 간단할 리가. 책임을 지기 위해서 우리는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가끔은 이를 위해 무수한 시간을 바쳐야 할 수도 있으며, 오랜 관계를 잃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다. 회피하고 싶다. 그거, 나만 잘못한 것도 아닌데. 쟤가 먼저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었는데.


그러나 회피할수록 더 크게 돌아오는 것이 책임임을, 우리는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책임이란 건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 책임감이다. 우리가 해내야만 하는 것, 혹은 지어야 하는 짐을 마땅히 손에 쥐고 도망치지 않는 것. 어른스럽다는 아이들과, 아이 같은 어른들 사이에 놓인 가장 큰 차이, 바로 책임감.



나는 과연 어른스러운 사람일까요


친구의 질문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나는 어른인가. 어른스러운가. 잘 모르겠다. “음, 그건 내가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얼버무리고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과연 책임감 있는 어른일까. 어른스러운 사람일까. 우선 내 몫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기는 했다. 어른이니까, 쉽게 포기해서는 안 돼. 어른이니까, 눈 감으면 안 돼. 어른이니까. 먼저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해, 어른이니까.


그러나 그것이 꼭 책임을 잘 지고 있다는 뜻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말들, 나의 행동, 나의 감정, 주변인들과의 관계, 업무와 일상. 모든 틈새에서 나는 종종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책임감을 느끼곤 했고, 그래서 종종 그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내가 그것들을 다 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팀장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저 사람처럼 나이 들지는 말아야지, 저 사람처럼 외면하지는 말아야지. 그로부터 느꼈던 감정을 어린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났을 때 다시 느껴서는 안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책임을 진다는 게 조금은 덜 어렵게 느껴졌다. 적어도 그 사람처럼 늙지 않을 자신은 있으니까. 그렇게 한 두 걸음 나아가다 보면, 나쁘지는 않은 어른이 되어 있지 않을까. 일단은 거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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