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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May 22. 2023

달력을 넘기다가 네가 문득 궁금해져서

우리는 왜 이런 사이가 되어야 했을까


달력을 넘기는 걸 깜빡했다. 4월을 지나 5월. 그것도 벌써 중순이다. 챙길 날들이 많다. 짧으면 두 달 전, 길면 반년 전에 적어두었던 메모들과 기념일들. 노동절, 어린이날, 혈육이 태어난 날, 친한 친구의 생일, 선배의 결혼식, 생일 1, 생일 2, 생일 3, 그리고 이제는 연락할 수 없는 누군가와의 약속이 적힌 날들. 아 참. 달력을 넘기는 것만 깜빡한 건 아니었네.


우연히 알게 됐고, 우연히 가까워졌고, 우연히 좋아했던 친구. 우연히 마주쳤을 때, 환하게 웃으며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이가 되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우연히라도 스칠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다시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 달력을 넘기면서도 울음을 삼켰다.


우리가 왜 이런 사이가 됐을까. 아직 지우지 못한 기억들이 문득 궁금해졌다. “나도 이제는 불편해서, 그냥 차단할게.” 그래. 그게 걔의 마지막 말이었다. 몇 마디를 더 건네 보았지만, 답장은 없었다.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은 반년. 인사도 없이 그와 나는 작별했다. 우리는 왜 이런 사이가 되어야 했을까.


네 잔잔함은 어쩌면 파도가 되어



그 친구와 나는 꽤 달랐다. 성격도, 습관도, 배경도, 말투도, 지역도. 비슷한 점이 있다면 서로를 꽤 재밌어했다는 것. 다르니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서로 전화를 끊지 않겠다고 오기를 부리다 늦은 새벽 잠들기도 부지기수였다. 할 말이 많지 않아도, 대화가 끊이지 않는 게 꽤 좋았다.


제일 좋았던 건, 그 친구의 성격이었다. 호수 같았다. 그 아이의 마음에는 쉽게 파도가 치지 않았다. 물결이 일어도 이내 잔잔해졌다. 그 잔잔함이 좋았다. 쉽게 동요하지 않고, 쉽게 가라앉지도 않는 마음.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필요를 찾아 배려할 줄 알았다. 배우고 싶었다. 닮고 싶었다. 나랑 달라서, 내게는 부족한 점이어서 그랬다.


그러나 내 다른 친구 A에게는 그게 지독한 단점처럼 보였나 보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못한다고, 문제 있는 관계를 끊어내지 못한다고, 그의 그런 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는다고 이내 그와 부딪히는 것조차 불편하다고 멀리하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친구가 A의 불편함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차단할게." 관계는 끝났다



둘 사이의 갈등은 지난하고 답답했다. 대화도 해보고, 싸워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그들의 문제는 곧 어쩔 수 없이 내 문제가 되었다. 그를 불편해하는 A가 불편했던 그는, 나 역시 불편해졌던 것 같다. “그냥 차단할게.” 여섯 글자로, 관계는 정리됐다.


반대편에는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한 무더기였다. 가습기, 핸드워시, 텀블러, 비타민, 티, 커피, 면도기, 캔디, 양말, 컵. 그에게 받은 많은 것들, 그 흔적이 여전히 내 삶에 범람했다. 치우려다가 치우지 못했다. 연애를 했던 것도 아닌데 끝은 그보다 더 구질구질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 내 마음이었다. 질문을 던질 수도, 대답을 들을 수도 없다. 이제 수다를 떨 친구가 사라졌다는 걸 알면서도 멍하니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린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생각한다. 내가 그때, 어떻게 했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걸까. 글쎄.


관계는 더럽게 어려워


너무 늦게야 알게 됐다. 내게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반드시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라는 걸. 또는 내게 나쁜 사람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라는 걸. 관계가 어렵지 않다고 느꼈던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오래, 오래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했었다. 오만이었다.


관계는 더럽게 어렵다. 내게 다시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고 해보자. 음, 글쎄. 아마 어떤 방법으로도 엉킨 실타래를 풀지 못했을 거다. 내 마음조차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다른 사람 마음인들 어떻겠어. 인간관계는 늘 다른 사람들의 선택이라는 변수가 얽힌다. 내 선택조차도 상수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제 며칠 지나면, 또 달력의 다음 장을 펼치게 될 거다. 6월이다. 6월이 오면 이 마음이 좀 정리가 될까. 글쎄. 6월 첫 주. 그 친구의 생일이 온다. 볼펜을 들어 그 부분을 검게 칠하려다 멈췄다. 이 정도 불편함은 어쩌면 교훈으로 꽤 괜찮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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