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인 점이 있다면, 모든 것들이 정말 완전히 떠나버리는 건 아니라는 것
주말 아침이면 TV 앞에 앉아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 시작하길 고대했다. 초등학교 4학년. 잘 읽지도 못하는 시계를 계속 쳐다본다. 그러고 있으면, 동생도 졸린 눈을 비비며 곁에 와 앉는다. “간절하게 원한다면 이룰 수 있을 거야. 그 눈 속에 숨어 있는 꿈을 찾아.” 그 애니메이션의 오프닝이었다. 지금 보면 조잡하게까지 느껴지는 3D 애니메이션의 낯선 질감의 배경. 그 곡과 함께 시작한 일요일은 특별하게 어딜 가지 않아도 행복했고 즐거웠다.
신축 아파트였던 우리 집. 집 앞에 있는 것이라고는 초등학교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렇게 고층도 아니었는데 쪼그려 앉아 창밖을 보고 있으면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겨울방학이 되고 눈이 오면 등굣길에서 쌀 포대를 타고 썰매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그게 꼭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겨울은 내게 로케트였다. 내 방 창가에 앉아서 눈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있으면 착시처럼 마치 내가 우주로 향하는 로케트를 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수능이 끝난 겨울의 교실, 짝은 “엄청 재밌는 노래를 찾았다.”며 한 인디밴드의 노래를 들려줬다. “시간은 스물아홉에서 정지할 거야라고 친구들이 그랬어. 오 나도 알고 있지만 내가 열아홉 살 때도 난 스무 살이 되고 싶진 않았어.” 말 그대로 재밌는 가사였다. 자꾸 다가올 스물을 곱씹게 됐다. 나는 과연 1년 후에 무얼 하고 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윽고 난 스무 살이 되었고 머지 않아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물음에 그 밴드의 이름을 대게 되었다.
스무 살에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를 꽤 좋아했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대개 나보다 한두 살 정도 어리거나, 두세 살 이상 많았다. 흔치 않았다. 첫 만남은 서울 시청 앞 거리, 그 아이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꽤 잘 맞았다. 취향도, 성격도, 취미와 가끔씩 젖어드는 우울함도. “나이는 그냥 숫자에 불과하다.”던 나는 모순되게도 그 친구가 나와 같은 나이라 참 좋았다. 같이 나이 먹어간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꽤 좋아했던 것들을 떠올려본다. 행복했던 순간들을 회상한다. 때로는 아찔했고 때로는 버거웠으며 때로는 눈물이 날 정도로 즐거웠던 시기. 그 모든 시간을 쏜살같이 통과해 나는 오늘에 도착했다. 서글픈 건, 그 시간들 속에서 내가 좋아했던 많은 것들을 계속해 놓쳐왔다는 점이다. 어쩌면 당연히 늘 곁에 있을 것 같았던, 혹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과 물건과 취향과 취미는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그렇게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은 1년 후 종영했고, 방 창가에 앉아 있으면 이제는 파란 하늘 대신 맞은편에 더 높게 올라선 아파트가 보인다. 그 가수의 노래는 넌 내 모든 것이라는 부류의 가사가 싫어져 듣지 않게 됐다. 뭐, 취향이 바뀐 거랄까. 동갑내기 친구와 같이 먹던 나이도 스물여섯에서 멈추고 말았다. 걔가 그때 내 애인에게 고백을 하는 바람에. 좋아했던 것들은 이렇게 예고도 없이 사라진다. 때로는 우습게, 때로는 비참하게. 보글보글 잘 끓인 김치찌개도 하룻밤이면 쉬어 버릴 수 있듯이.
그렇게 사라져간 좋아하는 것들을 애도하며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삶의 한때를 장식했던 순간들이 영영 끝난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르니까. 그만큼 시간을 들였고 마음을 썼으니까. 그만큼 의지했고 그만큼 즐거웠으니까. 마땅히 슬퍼해야 할 순간이다. 그 순간에도 억지로 고개를 저어 눈물을 참을 이유는 없다. 지금 슬프다는 건, 그때는 웃었다는 뜻일 테니까.
종종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슬픔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오래전 친구 K는 유독 놓쳐 버린 것들을 아쉬워하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에 슬퍼하는 사람이었다. 연인과 헤어지고 난 다음이면 더 했다. 몇 날 며칠을 슬퍼하고, 우울해했다. 계속 후회했고 계속 고민했다. 자신이 무엇을 했으면 달라졌을지,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지. K에게는 이런 말이 필요했을까.
충분히 슬퍼했다면 이제 그만 보내주어도 된다. 쉰 김치찌개를 다시 끓인다고 해서 그 맛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테니까. 쉰내 나는 추억과 쉬어버린 관계 역시, 이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정말 쉴 수 있도록 놓을 필요가 있다. 돌아본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면, 그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워할 필요 없을 것이다. 만약 아쉬움이 있었다면 앞으로 다가올 관계들에서 최선을 찾으면 된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우리 곁을 떠난 그 모든 것들이 정말 완전히 떠나버리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눈 내리는 창가에 앉아 로켓트를 탈 수는 없지만 그때의 흥미와 자극은 여전히 내게 남아 우주를 동경하게 했다. 동갑내기 친구는 사라졌고, 좋아하던 밴드는 더 이상 맘에 들지 않지만 그들 덕에 나는 기타를 조금이나마 칠 수 있게 됐다. 취향의 폭도 꽤 넓어졌다.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이 종영한 자리는 뽀로로가 넘겨받아 많은 아이들의 오랜 친구가 되어 주었다.
몇 년이 흘러 K는 이별하며 생길 상처가 두려워 무엇에도 정을 잘 주지 않으려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글쎄.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추억이 된다.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들과 이별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별이 두려워 좋아하길 주저할 필요는 없다. 그게 애니메이션이든, 음악이든, 일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무엇이든 마찬가지다. 만약 이별이 무서워 특별함을 놓친다면 K 곁에는 K 외에 무엇도 남지 못할 테니까. 삶이란 것은 본디 외로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한들 본인을 고립시킬 필요는 없다. 우리는 겪는 만큼 나아질 테니까.
내가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뮤지션은 그의 데뷔앨범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긴 세월에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그 사랑을 기다려 줄 그런 사람을 찾는 거야.” 무엇이든 영원히 지속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슬픔. 그리고 영원한 건 절대 없다며 나아가기를 포기한 사람의 고독 중 더 쓸쓸한 것은 무엇일까.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라는 개념을 드러낸 바 있다. 영원회귀는, 삶이란 원처럼 계속해 반복되며 죽음 이후에 새로 환생하는 것도, 사후세계에 이르는 것도 아닌 그대로의 삶을 탄생부터 죽음까지 다시 반복한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어떻게 살든 똑같이 죽을 것’이라며 비관에 빠질 수 있지만, 누군가는 그 반복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할 무언가’를 찾아 움직일 것이다.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우듯 말이다.
어쩌면 만남과 이별이란 ‘영원회귀’에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셸 공드리 감독의 수작 ⟪이터널 선샤인⟫ 속 주인공들처럼, 같은 사람과 영원히 반복되는 만남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사람들은 무언가를(혹은 누군가를) 만나고, 그것이 어쩌면 영원할 것이라고 믿지만 그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별을 맞고 만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른 것을(혹은 다른 사람을) 만나 똑같은 기대를 품고 만다. 나는 여기서,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 외치는 목소리를 듣는다.
곧 주말이다. TV 앞에 앉는 대신 모니터를 켜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을 틀어둘 테다. 시간에 맞춰 설정해둔 알람이 울리면 좋아하는 이에게 전화를 걸어 늦잠을 방해하고, 무얼 하고 같이 놀면 재밌을까 고민한 뒤에 늘 하던 게임을 켜고 몇 판은 이기고 몇 판은 진 뒤에 조금은 기분이 나빠진 채로 게임을 끌지도 모른다. 그 다음에는 적당히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재밌는 영화를 보면서 이 정도면 행복한 하루였어, 이야기하리라. 언젠가는 이런 일상과는 멀어진다고 해도 이 일상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웃고, 또 행복한 하루를 만들기 위해 애쓸 테다. 그게 분명 내 하루를 가치 있게 만들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