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이면서 소수자가 아닌, 당신과 나의 이야기
나는 남성이다. 젊다. 직장에 다니고, 돈을 번다. 아직 불분명한 질환 하나를 제외하면, 장애 또한 없다. 이성애자다. 수도권에 오랫동안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한국인이며, 나의 조상들도 대체로 그랬다. 유아세례를 받아 천주교에 교적을 두고 있다. 나는 많은 이유에서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가 아닌 셈이다.
나는 많은 기득권을 가지고 살고 있다. 여성에 비해 훨씬 안전하며, 성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지도 않는다. 장애로 인한 사회적 차별과 시선을 겁낼 필요도 없다. 정책들이 수도권 위주로 결정되고, 집행되는 것의 혜택을 꽤 보고 있다. 문화생활도 마찬가지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을 일도 없다.
그러니까 굳이 '사회적 차별'에 관심을 보일 이유도 없다. 내 일이 아니다. 남의 이야기다. 장애인, 성소수자, 소수 종교인, 저소득층, 소수민족, 비수도권 주민들이야 힘들겠지만,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무슨 상관인가. 나는 젊고 건강하며 수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잠깐 멈추어보자. 분명 나는 수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정확히는, 소수자 역시 누렸어야 할 것을 박탈해낸 편안함이다. 내가 가사노동을 덜 하면서, 여성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노인들과 아동의 권리 위에서, 장애인을 차별하면서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별, 나이, 소득, 장애, 성 정체성, 거주지역, 인종, 종교 등은 절대 불변의 것인가. 묻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아닐 수밖에 없다. 나는 곧 나이가 들 것이다.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될 것이다. 지금이야 직장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 있지만 혹시 모종의 이유로 해고라도 당하게 된다면? 내가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게 될 확률은 배제해도 좋을 만큼 낮은가? 내가 정말 확고한 헤테로 섹슈얼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내가 천년만년 수도권에서 살 수 있다는 건 또 누가 보장해준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지금은 수많은 기득권을 지니고 있지만 잠깐뿐일지 누가 아는가. '소수'라는 이름은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소수자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모두들 조금씩은 소수자이기도 하다. 이것이 모두가 모두의 곁에 서야만 하는 이유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양서류 인간'은 인간들에 의해 박해받고, 괴롭힘당하는 존재다. 언어장애인인 주인공 엘라이자 에스포지토는 그런 양서류 인간을 사랑하게 됐고, 이윽고 그를 탈출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성소수자 노인이자 백수인 자일스 건더슨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는 양서류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며 위험하다고 거절하자, 엘라이자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결국 그는 마음을 바꿔 엘라이자와 양서류 인간을 도우려 한다. 흑인 여성으로 정체화되는 젤다 풀러 역시 그들을 돕는다. 결국 아주 어렵게, 그들은 양서류 인간에게 해방을 선사한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도운 것은, 결국 '정상인'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고아, 장애인, 여성, 흑인, 성소수자의 '연대'였던 셈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면서, 동시에 인간인' 사람들이다. 사회 어느 곳에 서 있느냐에 따라 참지 못할 무시와 멸시를 받기도 하고, 동시에 반대편에서 다른 사람을 향해 차별적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엘라이자의 말은 이런 지점에서 우리에게도 역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만약 누군가 '소수자'임을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다면 우리는 엘라이자가 그랬듯 나설 필요가 있다.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라면 우리가 똑같은 이유로 괴롭힘당하고 있을 때, 나를 위해 나서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니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 우리는 고아, 장애인, 여성, 흑인, 성소수자와 함께하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