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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Jan 06. 2023

그리스도인의 인격 05 온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온유는 천성적인 유순함이 아니다


운전습관을 보면 사람들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가는 할아버지를 만나면 어떤 운전자들은 조용히 비켜간다. 반면 어떤 운전자들은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댄다. 전에 한 번 길에서 그런 경험을 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경적을 울리며 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만일 내가 걸어가고 있지 않았다면, 운전을 하고 있었다면, 나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물론 선천적으로 성격이 거침없거나 냉정한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천성이 따듯하고 부드러운 사람들도 있다. 어떤 성격을 가졌든지 다 세상에 필요한 사람들이고, 공동체 안에서 유용한 성격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유’는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인격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 온유함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라고 하면서 거침없고 냉정한 성격도 모두 필요하다고 하면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라고 질문할 수 있다. 거침없고 냉정한 성격은 온유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천성이 따듯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요? 그럼 하나님은 왜 거침없고 냉정한 성격을 만드셔서, 힘들게 다른 성격을 따라가게 하셨나요?”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온유라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오해하고 있다. 온유는 그저 따듯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거침없고 냉정한 성격도 얼마든지 온유할 수 있다.     



온유,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성품을 가지셨다고 말씀하셨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온유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프라위스’라는 말이다. 이 말은 ‘겸손하다’ 또는 ‘온순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서 온유라는 말은 ‘겸손하고 온순함’을 뜻한다.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며 온유와 겸손을 함께 쓰신 이유가 있다. 온유라는 단어 자체에 겸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겸손은 그리스어로 ‘타페이노스’라는 말인데, 이 말의 원래 뜻은 ‘누군가에게 복종해야 하는 낮은 신분’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인 온유를 갖추고 계셨는데, 예수님의 온유는 겸손하고 온순해서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인격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그 누군가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다.     

이 ‘온유’라는 말이 성경에서 처음 사람에게 사용된 것은 민수기 12장 3절에서였다. 이 말씀은 모세의 성품을 묘사한 말씀이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이 구절에 사용된 ‘온유함’은 히브리어로 ‘아나우’라는 단어다. 이 말 역시 ‘겸손하고 온순함’을 뜻한다. 히브리어의 이 단어는 양의 성품을 뜻한다. 양들은 그 성품이 얼마나 온순한지, 주인이 양털을 깎을 때 그저 가만히 주인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긴다. 심지어 양을 잡을 때조차 양들은 주인의 뜻에 반항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온 세상의 죄를 사하시는 모습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도살될 어린양’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한 비유였던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니 온유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인 온유는 성격이 거칠고 냉정하거나 따듯하고 부드러운 것과 상관없이, 얼마나 나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말하는 인격이다.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온유다.     



온유하게 살기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온유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산상수훈에는 온유한 인격과 관련된 세 가지의 명령이 나온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명령과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명령, 그리고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 리까지 동행해주라는 명령이다.(마 5:39-41)     

뺨을 맞는 것과 속옷을 빼앗는 것, 오리를 가자고 하는 것은 모두 원수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서 악한 자는 바로 원수다. 원수를 꼭 집어 말하라면 ‘로마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른손잡이다. 그래서 오른손으로 따귀를 때리면 상대방은 왼뺨을 맞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신 걸까? 혹시 그냥 착각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오른뺨을 때리는 것은 매우 계산된 행위였다. 사람이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려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 손등으로 사람의 얼굴을 때리고 그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는 심한 모욕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에서 당하신 모욕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에 누가 유대인들의 오른뺨을 때리는 사람들인가? 바로 유대를 정복하고 그들에게 수치를 안긴 로마인들이었다.     

속옷은 ‘부’의 상징이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겉옷은 군병들이 찢어서 나눠 가졌지만, 예수님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가져갔다. 그 이유는 부의 상징인 비싼 속옷은 찢어지면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속옷과 반대로 겉옷은 목숨을 상징한다. 율법에 보면 겉옷은 저당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심한 일교차로 인해 저녁이 되면 기온이 많이 떨어진다. 그때 겉옷은 체온을 유지해주는 유일한 보호막이 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겉옷은 그의 생명과 마찬가지였다.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은 부를 독차지하고 유대인들을 가난하게 만든 로마인들에게 생명까지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십 리를 함께 가라는 명령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거리 개념으로는 십 리가 약 4Km 정도 되지만, 성경의 거리 단위는 우리와는 좀 다르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거리 중에 ‘리’라는 단위는 약 1.5Km가 된다고 한다. 계산해 보면 오리는 약 7.5Km 정도의 거리이고 십 리는 약 15Km가 된다. 건강을 위해서 ‘만 보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일반적으로 만 보를 걸으면 7~8Km를 걷는다고 한다. 성경의 오리가 딱 만 보인 셈이다. 전에 가족들과 함께 남이섬을 한 바퀴 돌았더니 정확하게 만 보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남이섬 한 바퀴 정도의 거리가 성경의 오 리, 두 바퀴 돌면 성경의 십 리가 된다.     

정말 좋아하는 친구나 연인이 남이섬 한 바퀴 돌고 오자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한 바퀴가 아니라, 두 바퀴도 돌고 올 수 있다. 그런데, 이 또한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에 로마법으로 로마의 군인들이 식민지를 지나갈 때 피지배민들에게 군장을 지워 동행하게 할 수 있는 강제동원권이 있었다. 식민지의 백성들은 로마 군인이 명령하면 그들의 군장을 메고 오리를 의무적으로 동행해야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로마인들이 오리를 동행하자고 하면 의무를 넘어 십리를 동행해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악한 자들에게, 원수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나를 모욕하고, 나의 이익을 날치기하고, 권리를 빼앗아 가는 이들에게, 왜 복수하는 게 아니라, 더 내어주고 의무 이상의 친절을 베풀어야 할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도 해를 비추시고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려주시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온전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고 온순하게 따르는 그리스도의 성품, 온유인 셈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악인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선하실까? 그 이유는 참으로 간단하고 명확하다.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도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 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의 원수라도 하나님은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악인들과 우리의 원수들에게도 선대 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온유, 원수를 용서하는 것


우리는 이게 대단히 불편할 수 있다. 우리는 소위 ‘진영론’이라는 것에 쉽게 매몰되기 때문이다. 내 편이 아니면 반대편이다. 내 적의 적은 내 편이라고 생각한다. 내 친구라고 해도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대하고 친절하면 친구조차 나의 적이 되어버린다. 이게 정치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깔려있는 의식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진영론’이다. 이 ‘진영론’은 교회 안에도 만연하다. 대놓고 “목사님은 누구 편입니까?”하고 묻는 교인들도 있다. 목회자에게는 모두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교인이고 양들이다. 목양을 하는 목사가 부족한 사람도 사랑하고 실수한 사람도 사랑해주어야 참된 목자인 것이다. 그런데 간혹 어떤 이들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대하고 축복해주면 목회자조차 원수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신가? 하나님은 내게 악을 행한 사람이라도, 나의 원수조차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 그럼 하나님도 나의 원수가 되셨는가? 그럴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을 원수로 삼는다면 나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영원한 형벌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신앙인은 될 수 있으면 빨리 이 못된 진영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나에게는 어쩌다 원수가 되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원수였던 로마인들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유대인 전도자들을 통해 로마인들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바로 그 로마인들을 통해서 세계를 구원하는 길을 여셨다. 산상수훈을 듣던 당시의 제자들에게는 로마인들이 철천지원수였지만, 나중에 그 제자들이 교회를 세울 때는 많은 로마인들이 동역자가 되었다. 악인들도 회개하면 전도자가 된다. 원수도 회개하면 동역자가 되는 법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악하게 대하는 이들에게 선을 베풀기 참 어렵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인 온유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기에 우리도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편지했다.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아셨기에,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원수 된 자들까지도 긍휼히 여기셨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은혜를 베푸셨다.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온유는 구원을 이루는 인격이다. 우리가 온유함을 갖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온유에는 중요한 유익이 있다.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온유해야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는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에는 무거운 짐들이 쌓인다. 그런 마음에는 결코 쉼이 없다. 절대로 평안이 깃들지 않는다. 오직 긍휼히 여기기 시작할 때, 마음의 짐이 하나씩 덜어진다. 악다구니니치고 분노하는, 세상이 주는 멍에는 무겁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가볍다.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며 사는 삶이 훨씬 쉽다. 그리스도의 인격인 온유를 갖게 되면, 그리스도의 평강을 경험하게 된다. 


무거운 짐을 지고 고된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가벼운 짐을 지고 평강이 넘치는 인생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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