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스키 May 19. 2021

특별할 것 없는 모래알들의 경쟁심

백번일지-등산일기

오늘 날씨는 맑음. 새벽 다섯 시 반, 가벼운 차림으로 등산로 입구에 섰다. 적당한 높이, 소요시간 두 시간, 적당한 난이도와 적절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산이다. 이런 산을 만난 것도, 산에 오르기 적당한 타이밍을 알아낸 것도 행운이다.


항상 비슷한 새벽 시간에 출발해도 주변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 여름 초입의 등산로 입구에는 새벽 등산이라기에 무색한 밝음이 가득하다. 계절의 변화는 새벽 등산을 아침 등산으로 바꾸어 놓았다. 계절은 내 힘으로 바꿀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걷는 것.


이른 시간에도 오가는 사람들이 꽤 있다. 겨울 다섯 시 반이라면,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혼자였던 적은 없다. 아주 깜깜한 깊은 새벽에도, 오로지 나 혼자만 있을 것 같은 시간에도 산속에 누군가는 있다. 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산길을 걷다가 마주친 서로가 서로를 보고 놀라는 어둠 속.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를 공감대가 있다. 새벽 등산의 매력을 아는 사람이구나.


혼자 하는 새벽 등산에서 맛볼 수 있는 특별함 중 하나는, 새벽의 고요와 어둠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의 존재는 타인에게는 고요와 어둠을 몰아내는 소음과 잡광이다. 어쩌다 마주친 존재로 나의 고요한 평화가 방해받는다고 느낀다면, 그 느낌은 그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는 편이 낫다. 저 알 수 없는 어둠 속 존재는 나를 방해하려는 악귀가 아니라,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질, 이 시간과 공간의 을 아는, 공감할 수 있는 존재임이 틀림없다고. 우리는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는, 누군가는 약간 미쳤다고 볼, 하나의 인간종들이라고.


날씨가 맑고 해가 갓 뜬 시간에는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로를 조절해야 하고, 페이스가 비슷한 사람과는 알게 모르게 경쟁도 하게 된다. 속도가 비슷하다면 서로의 길을 비켜주는데, 그 타이밍 맞추는 일이 번거로워질 때가 있다. 그러면 부러 천천히 걷거나, 속도를 높여 달려 나가기도 한다. 대개는 걸음이 빨라진다. 먼저 정상에 오른다고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니고 그 상 받아서 어디 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경쟁이 시작되면 평화로웠던 산 길은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전장이 된다.



경쟁의 긍정적인 효과는 명확하다. 성장의 촉매, 승리의 희열, 도전의 동기부여. 운동 측면에서 보자면 혼자 걷는 것보다 경쟁자가 있는 편이 효율이 더 낫다. 자동으로 인터벌 트레이닝을 하게 되고, 혼자 할 때보다 더 좋은 기록이 나온다. 물론 심한 경쟁은 우울과 불안을 주고, 우열과 차별을 낳는다. 이에 대해서 이미 우리는 학교에서 너무 많은 경험이 있다. 학교에 들어간 순간부터 적어도 한국에서는, 지긋지긋한 경쟁이 시작된다.


한국 교육의 미래를 위해 경쟁을 화끈하게 줄여야 한다고 말하는 한 교수가 있다. 하지만 이 분도 경쟁에 너무나 익숙했을 분이다. 이기기 위해 누군가를 패배자로 만들고, 칭찬과 박수에 우쭐대기도 하며 치열하게 사셨을 것이다. 이 교수의 흥미로운 강연은 그럴듯한 거대담론이다. 이상적인 교육 시스템의 모델을 독일에서 찾는다. 강의를 들어보면 현실에서 넘어야 할 벽들을 당장 부수고 미화되어있는 한 모델을 좇아야 할 것만 같다. 학자로서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것,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것은 훌륭하지만 대안이 성급해서는 안 된다. 사회 문제는 한 가지 해법으로만 풀어갈 수가 없다. 지나친 경쟁으로 행복하지 않은 학생들의 삶이 가여워 경쟁 자체를 막아버리는 일이 성장의 기회조차 박탈해 버리는 실수일 수 있다.


시험이 있는 한 교육의 결과는 보통 경쟁에서 이긴 순서로 결정된다.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최근에는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 폐지 이슈가 있다. 교육 불평등과 경쟁을 완화하려는 건 좋지만, 입시제도와 대학 재편 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는 의문이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긴 하다. 그 이유가 허울이 좋은 이상적 담론이라면 현실 적용은 성급하지 않게, 신중해야 할 텐데.



교육시스템을 만드는 어른들이 쉽게 간과하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는 '학생들의 행복'이다. 그 행복은, 경쟁에서 도태되어 우울감에 빠진 친구들을 구해주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누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했는가. 물론 성적 말고도 많은 행복이 있지만 성적이 높으면 행복하다. '1등'은 크고 확실한 행복이다. 1등들에게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다른 성공도 이룰 가능성이 커지며 자존감도 높다. 작은 성공들이 모여 큰 성공이 되는데, 큰 성공들은 얼마나 더 큰 성취를 불러올 것인가. 그 커다란 성취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성장을 바란다면 작은 성공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격려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누구나 그럴듯한 이유 한 두 개 씩은 가지고 있다.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슈에 대해 생각이 충돌한다면, 가만히 바라보자. 경청해보면 그럴듯한 이유 한 가지는 있다. 없어 보여도, 찾아보면 누구에게나 존재의 이유도 있다. 어차피 듣지 않을 상대방에게 말할 시간에 그의 존재 자체를 느껴본다면 모두가 조금은 더 평화로워진다. 싸울 생각이 없는 상대와 싸우는 일은 누구나에게 버거운 일이다.  


사실 어떤 교육시스템에서든 우리 아이들은 잘 자랄 것이다. 진지한 어른들의 걱정보다, 생각보다 너무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시스템은 지구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먹구름 속 파도를 이겨내고 파도에 올라타 실버라이닝을 본다면, 누군가는 다음 파도를 기다린다. 타이밍은 다르지만 파도는 항상 온다. 거친 파도 속 어린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질 것도 아니라면, 목숨 걸고 싸울 일도 별로 없다.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도 않은 이상을 위해 나 자신의 역사를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학교에서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도 벗어난 산에서조차, 경쟁심은 경쟁하지 않아도 될 곳에서도 생기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언제쯤 경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질까? 산이 가르쳐준 한 가지 해법은, 그 마음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저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덜 지친다. 우리를 힘들 게 하는 건 한 걸음 옮기는 것보다 더 큰 걸음으로 걸어야 할 것 같은 마음 때문이니까. 경쟁하듯 달린 너와 나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이 넓고 긴 시간 속에서 스치듯 만난 인연일 뿐인데, 나는 너 때문에 왜 이렇게 조급해진 걸까. 알아차리기만 해도 자유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제가 누군지 관심 없어요. 사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문제로 고민하지 않죠. 난 진흙처럼 평범하다는 게 정말 좋아요. 남들로부터 지켜야 할 것도 없고, 마음도 편하죠. 제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 모래알처럼 많은 인간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니 날아갈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답니다.

-웬디 러스트베이더, 『살아가는 동안 나를 기다리는 것들』


진흙처럼 평범한,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인간들이 서로가 더 특별하다고 싸우는 시간에도 산은 그 자리에 있다. 사람들은 마침 그 타이밍에 그곳에서 만났을 뿐. 존재는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분주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의미를 찾는다. 시시포스처럼 떨어지는 돌을 계속 밀어 올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니 조금 더 여유 있게 걷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숲 속을 거닐자. 산 너머 나무 타고 불어오는 여름 바람이 얼마나 신선한가. "아 행복하다"라고 언제 말해 보았는가. 가만히 바라보니, 지금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