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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흑백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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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우림 Apr 25. 2016

나의 경솔함 때문에

오후 혹은 초저녁, 여섯 시부터 일곱 시 사이. 직장인들의 퇴근시간. 아침 출근시간과 함께 하루 중 지하철 2호선 차 칸이 가장 붐비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가급적 지하철을 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꼭 타게 되는 날이 있다. 이런 날에는 승강장에 도달한 순간 ‘아차!’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그랬다. 역에 가득한 사람들을 발견하고서야 시계를 봤다. 여섯 시가 막 넘은 시간이었다.


 열차에 오르지도 못하고 두 대를 그냥 보냈다. 칸 속으로 한 발 내딛기도 어려워 보인 탓이었다. 두 대를 그냥 보냈다. 세 번째로 도착한 지하철의 문이 열렸고 이대로 계속 그냥 보냈다가는 목적지에 제시간에 맞춰 도착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틈을 비집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밀려 밀려 좌석에 앉아있는 한 아저씨 앞에 서게 됐다. 그렇게 한 정거장 지나고 두 정거장 지나고. 자리에서 눈을 감고 머물던 아저씨가 내게 가방을 달라고 했다. ‘무거 워보이 니 들어주겠다’는 말로 이해하고 괜찮다고 거듭 사양했지만 아저씨는 가방 끈을 잡고 자신 쪽으로 계속 끌어당겼다.


 ‘실제로 들어보면 그렇게 무겁지도 않을 텐데. 왜 그랬을까?’ 그러다 아래를 보게 됐고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나와 아저씨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사람으로 가득한 지하철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가까운 것은 당연하다. 아래로 축 늘어진 내 가방이 나름의 휴식을 취하던 그의 다리를 계속해서 쳤고,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를 괴롭힌 것이다. 아저씨는 참다못해 내게 가방을 달라고 한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그렇게 어렴풋이 이유를 알게 됐지만 이번엔 어떤 불안함을 느꼈다. ‘내가 알아낸 이유가 틀렸으면 어쩌지? 왜 지하철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잖아? 내 가방을 들고 있다가 돌려주지 않으면 어쩌지? 아니면 내 가방을 들고 있다가 자기가 내려야 할 곳에 먼저 내려버리면 어쩌지? 쫓아가서 빼앗아야겠지? 그럼 귀찮은 일들이 생기겠지? 다 가져도 좋은데 공책은 돌려줬으면 좋겠는데.’  ‘왜 이 아저씨가 가방을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끝까지 거부하지 않았을까? 왜 사람들은 나를 이 곳으로 밀었을까? 그럼 나는 대체 왜 밀린 거지.’ 그리고 지하철에 오른 이후부터 순간순간 기억에 남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원망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의 목적지에 다 왔음을 아저씨에게 알렸고 그는 눈을 뜨고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품에 있던 물건을 내게 건넸다. 가방을 돌려받고 갈 길을 가다 짐이 이 전보다 더 무거워져 버렸음을 느꼈다. 내 경솔함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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