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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팡팡이 Mar 03. 2016

25. 드르르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르륵,

잘다녀와 멍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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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르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르륵


  걸을 때마다 땅을 보고 걷는 여자가 있다. 그녀가 바로 나다. 그녀의 눈길이 멈춘 곳은 드드르르르륵 반복된 소리가 나는 곳, 캐리어를 끌고 가는 남모를 여자였다.


  노량진에서 1년간의 수험생활을 했다. 학원이나, 스터디 후 늦은 귀가 뒤 들리는 소리는 음식 소리, 대화소리, 싸우는 소리, 저마다 배회하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가 들리는데, 그 중 유독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드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륵 거리는 캐리어 끄는 소리였다.


  아침은 물론, 한밤중에도 들리는 소리다.  공부하다 필요한 짐을 챙기기 위해 캐리어만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이기도 하고, 누군가 보고 싶어 훌쩍 떠나는 소리이기도 하고, 좋은 소식을 가득 안고 떠나는 소리이기도 하다. 먼 고향에서 올라와 수험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부푼 꿈을 안고 노량진에 도착하기도 하는 소리이기도 하고, 부푼 꿈이 좌절된 뒤 고향에 살길을 마련하러 가는 소리이기도 하다.


  경찰공무원, 행정고시, 임용고시 등등 여러 종류의 시험일정이 각각 서로 달라 끊임없이 들리는 소리였다. 일찍 잠드는 날이면, 새벽 동틀 무렵에도 어김없이 거슬리는 소리였고, 하루 유동인구만 10만인 노량진에서 가장 유난스러운 소리이기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도시 입구라 기차역과 가깝고, 시외버스나 고속버스가 마지막으로 들려 사람을 태우는 곳이라 외국인도 간혹 보이고, 대학생들도 자주 보이고, 주말마다 여행객, 등산객들로 넘치는 곳인데, 그 중에는 캐리어를 끄는 이들도 제법 보이니, 아무래도 나는 눈길을 머물 수밖에 없고, 드르르르륵 소리를 들을 때마다 노량진의 기억이 새록히 떠오르는 것이다.


  오늘 떠났다. 한번 쯤 만나고 싶었던 사람과, 한번 쯤 만나야 할 애정하는 동생이 떠났다.


  여행도 많이 하려고 노력했고, 노량진에도 있어 봤던 터라 캐리어는 이왕이면 돈을 들여서 좋은 것을 사야한다고 생각한다.   

  낡은 캐리어를 몇 년 동안 들고 다니면서, 위험천만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캐리어가 고장 나서 짐들이 다 쏟아 나올 뻔도 하고, 지퍼가 고장나 짐을 꺼낼 수 없기도 했다. 값싼 캐리어라 유난히 드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륵 소리가 크게 들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런 캐리어를 갈아치워 버렸다. 값도 제법 나가고, 튼실한 놈으로 바꾸었다.


  한번 쯤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은 만날 수 없으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한번 쯤 만나야할 애정하는 동생에 대해 생각했다.

  부러운 녀석이다. 지금 이곳저곳 떠돌다 잠시 정차하더니 그곳에서 열심히 돈을 모아 다시 여행을 떠났으니, 아이슬란드, 모로코, 파리.... 아 말만 들어도 얼마나 황홀한가, 한국엔 6월에나 온다하지만 글쎄 오려나? 늦어 질 수도 있겠지, 라며 생각했다. 여행이란 자고로 시간엔 쫓기진 않을 테니, 돈으로 시간을 사고 경험을 사는 일이니 말이다.

  작은 캐리어를 들고, 이곳저곳 활보할 녀석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안녕’이라 말해놓고 연락될 때 연락한다던 녀석은 그러니까 값비싼 캐리어는 아니더라도, 좋은 캐리어는 끌고 다닐까 하는 상상에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름다운 곳들을 탐방하다니 값싼 캐리어라도 혹은 값비싼 캐리어라도 그곳에서 들리는 드르르르르르륵 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자기 얘기를 하기 싫어하는 녀석이니까, 분명 이 글도 엄청 싫어하겠다. 그렇지만 너는 떠났고, 만나고 싶었던 사람도 떠났고, 캐리어를 끌고 가는 남모를 여자도 마주쳤으니, 당연히 생각날 수 밖에.


잘갔다와 멍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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