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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명 Dec 11. 2015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약을 먹고 잠을 잤지만 알 수 없는 배의 통증은 여전했다. 미국에서 지인이 챙겨준 우동 국물만 연신 들이켜 배를 채웠다. 

  아파도 떠나야 하는 것이 여행객의 숙명인지라 식은땀을 흘리면서 가방을 꾸리다가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이제 몇 번 남지 않은 짐 꾸리기에 아쉬움이 터져 나와 짐 하나하나를 더욱 정성 들여 매만졌다. 이제 완전히 쓰임이 끝난 소지품들에게는 수고했다는 말까지 건네며 가방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요안나 아주머니에게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더 격렬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깊은 포옹으로 마음을 대신했다. 앞치마를 두른 채 만면에 미소를 띠고 손을 흔드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오래도록 뒤통수를 간지럽혔다.   

  공항으로 가는 택시는 무사히 잘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이 돈이 내가 가진 전부인데 공항까지 데려다줄 수 있겠니?’하고 물었다. 꼬깃꼬깃 접은 쿡과 쿱이 뒤섞여 들려있는 내 손바닥을 흘깃 본 기사는 경찰에게 골목에 잠시 차를 세워도 괜찮은지 허락까지 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뒤따르던 올드카가 더 멋있어 보여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은 조용히 덮어두기로 하자. 

  친절한 기사 덕분에 주머니를 탈탈 털어 만든 16쿡도 채 되지 않는 돈으로 공항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는 공항에 도착해서 내가 내민 돈을 택시기사가 제대로 세어보고 더 달라고 할까 봐 가방도 미처 메지 못한 채 공항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섰다. 남편은 여차하면 부족한 택시비를 충당하려고 마우스와 바리깡을 꺼내놓았다고 했지만 다행히 한국까지 도로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 지레 걱정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쿠바 사람들의 무심한 듯한 따뜻함에 감사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 저장해둔 걸로 생각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찾을 수 없어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을 저어 발권을 완료해준 직원 덕분에 무사히 출국심사까지 마쳤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제 게이트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릴 일만 남았는데 왜 내 수중에는 출국세 50쿡이 남아있는 거지? 우리가 온 길을 되짚어 생각해보아도 세금을 지불할 만한 곳은 없었다. 또 있었다고 한들 우리가 그냥 지나쳐올 수 있는 곳도 아니지 않았을까? 설마 비행기 탈 때 내려나? 아니면 비행기 안에서? 말도 안 되는 추측만 거듭해봐야 우리 둘의 머리에서 답이 나올 리 만무하여 남편이 다른 여행객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그 사람들은 비행기 티켓에 세금이 포함되어있는 것 같다며 ‘tax’ 항목이 적힌 자신들의 티켓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전자항공권에는 총액만 나와있어서 그들과 같은 처지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출국세를 내지 않은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일단 마음을 놓았다.   

  동시에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우리가 현금인출을 하지 못해 푼돈만 쥔 채 얼마나 궁상맞은 여행을 해야 했던가! 50쿡이면 번듯한 레스토랑에서 랍스터를 먹을 수도 있었고 멋진 올드카를 타고 코히마르를 왕복할 수도 있었으며 잘못 주문한 다이키리를 먹어치우고 다시 제대로 된 다이키리를 주문해서 맛을 볼 수도 있었다. 족히 여덟 잔은 마실 수 있는 금액이었다! 분명히 꼭 챙겨놔야 하는 돈이라고 해서 지갑에 있으되 돈이 아닌 채로 꽁꽁 접어두었던 것이 갑자기 비행기가 뜨기 전에 써 없애야 하는 여윳돈으로 전락해버리고 만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나는 마지막까지 그 돈이 필요한 어느 순간을 상상하며 마음을 졸였지만 남편은 이미 ‘아바나 클럽’ 3년 산과 7년 산 한 병 씩, 시가 한 상자 그리고 맛이 좋다는 쿠바산 커피까지 사들고는 애써 먼 곳을 응시하며 웃음을 숨기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잔돈으로 부카네로 Bucanero 맥주까지 한 캔 사서 들이켰으니 쿠바에서 해야 할 것, 먹어야 할 것, 사야 할 것은 얼추 다 한 셈이 되었다. 없는 살림으로 모든 것을 이루고 보니 기적도 이런 기적이 없었다.   

  여행 동안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이 기적, 계획에 없던 일들이 일어났으나 결국 마음먹은 일들이 이루어지는 기적적인 일들을 생각해보면 무슨 일이든 간에 섣부르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기다려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의 쿠바 여행은 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를 때까지 그렇게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이제 기나긴 여행을 마무리하고 몸 구석구석에 배인 고단함과 꾀죄죄함을 벗을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서서히 다시 사회로, 내 삶의 터전으로 돌아갈 순간이 머지않게 되었다. 여행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해 줄 마지막 축제만 남아있었다.   

  두 시간 정도의 짧은 비행으로 멕시코에 도착했다. 정확히 말하면 멕시코가 아니라 칸쿤, 좀 더 정확히는 ‘파이니스트 플라야 무헤레스 Finest Playa mujeres’ 리조트로 가는 것이니 멕시코 여행을 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멕시코 땅을 밟기는 했다.   

  칸쿤 공항에서는 짐 검사를 몹시 깐깐하게 했는데, 몇 명은 무작위로 뽑혀 가서 말 그대로 가방이 샅샅이 파헤쳐졌다. 남편도 그중 하나였다. 커다란 두 개의 짐가방은 모두 풀어헤쳐졌다. 쿠바의 낭만을 헤집어 놓은 것 같아 살짝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공항을 나서는 순간 쿠바와는 또 다른 후덥지근한 열기에 숨부터 막혔다. 휴양지의 공항답게 출국장 앞은 온갖 리조트에서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직원들, 택시 기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름이 적힌 수많은 판에서 우리 이름을 찾아보았으나 금세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들을 비집고 출국장 앞 통로를 두세 번 왔다 갔다 했더니만 어느새 땀이 줄줄 흘렀다. 무서운 더위였다. 사람들을 붙잡고 우리가 예약한 ‘그레이 라인 Grey line’을 물어보니 모두들 푸른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을 찾으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또다시 같은 길을 수차례 왕복해도 그런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눈이 저절로 찌푸려질 만큼의 더위와 피로에 결국 사람들 무리의 한 편에 가방을 내려놓고 좀 쉬어야 했다. 더 이상 물어볼 곳도 없고 이미 값을 치른 차를 포기하고 택시를 타기도 마뜩잖았다.   

  고생을 각오하고 넘어온 멕시코가 아니어서, 이제 편하게 여독이나 좀 풀고 쉬자는 마음으로 넘어온 멕시코라서 그 잠깐의 시간이 더욱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땀 흘리며 고생하는 여행은 쿠바에서 끝났다고 생각해서 마음가짐이 완전히 풀어지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배도 여전히 아팠다.   

  막막한 마음과 더위로 인한 짜증을 다 뱉어버리는 심정으로 숨을 길게 뿜어내던 그때, 저쪽 구석에 서 있는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벽에 기대어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가슴팍에 붙은 아주 작은 로고가 그가 ‘grey line’ 직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흰 셔츠는 맞았지만 검은색에 가까운 감색 바지를 입은 그는 도통 손님이 나오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우리가 그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직원을 만났다고 해서 쉽게 차에 오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상치 않게 추가로 지불해야 할 돈이 있었고 그 때문에 ATM을 찾아 생각지도 않은 멕시코 페소를 출금해야 했다. 또 거스름돈이 없다는 직원 때문에 불필요한 물까지 사야 했다. 물을 사들고 온 나에게 뒤늦게 웃으며 시원한 물 두 통을 서비스라며 내미는 직원이 나를 골탕 먹이려는 심보는 아니었는지 진심으로 의구심이 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에 섣불리 안심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를 태운 택시는 칸쿤 시내를 조금 지나 리조트 단지로 들어섰다. 그런데 단지의 입구가 예전 스리랑카에서 우리가 예약한 숙소와 이름이 비슷해서 잘못 찾아갔던 고급 호텔의 입구와 무척 흡사했다. 문득 그때처럼 잘못된 리조트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자리가 아닌 곳으로 갔다가 또 짙은 아쉬움만 남기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소심한 마음에 구글 지도를 켜서 방향을 확인한 후에야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멈출 수 있었다.   

  울창한 숲길을 한참 지나 우리 리조트 이름이 크게 쓰인 간판을 지나고 나니 고단한 여행이 진짜로 끝나가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리조트 앞에 내린 우리에게는 따뜻하고 새하얀 웰컴 타월이 주어졌다. 나는 그동안의 여행에 찌들어버린 거친 손을 연신 닦아내었다. 보송보송해진 손에는 경쾌하게 기포를 쏘아 올리는 샴페인 잔이 들렸다. 잔을 들고 육중하게 입을 벌리며 우리의 입장을 허락하는 거대한 나무문을 들어서는 기분은 무어라 한 마디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문의 위쪽 끝이 어느 만큼 높이 솟아있었는지 인식되지 않을 만큼 크게 느껴지는 그 문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백일의 시간 동안 믿고 의지할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남편과 나, 서로 뿐이었고, 모두들 제 살기 바쁜 세상에 우리가 잠시 공간을 빌려 그들의 삶을 기웃거리던 시간들을 보냈는데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웃음을 보이는 것이 너무나 낯설었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공간으로 들어서는 것이 어색하다 못해 송구스럽기까지 했다.   

  하얀 테이프로 여기저기 기워진 레인커버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꼬질꼬질한 냄새를 풍기는 우리의 거대한 가방들도 금색의 카트에 실려 귀한 대접을 받으며 옮겨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혹독하게 뒹굴던 녀석들이 호사를 누리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서 뜨거운 숨 덩어리가 울컥하고 목젖까지 올라왔다.   

  가방을 풀 겨를도 없이 저녁시간이 시작되는 바람에 우리는 해변에 열린 저녁 파티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들어섰다. 그나마 남편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으나 등산복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넓적한 크록스를 신은 여자는 그 해변에 나 혼자뿐이었다. 하늘거리는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한 여자들 틈에서 나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하지만 신나는 함박웃음과 기쁨의 기운을 온몸 가득 풍기고 있는 사람도 역시 우리뿐이었다. 모두들 익숙한 듯, 당연한 듯, 혹은 아주 약간 특별한 듯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었지만 우리는 마음속에 피날레의 불꽃이 신나게 터지고 있어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둘이서 몇 번이고 발을 구르고 눈을 크게 뜨며 숨죽여 외쳤다. 

  “우리가 드디어 칸쿤에 왔어!! 여행을 다 마쳤다고!!”  

  아무리 외쳐도 불꽃의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마티니 한 잔에 기분 좋게 취했을 때쯤, 푸르스름하게 변해가는 저녁 하늘 아래로 평화롭게 살랑거리는 카리브해의 바람이 느껴졌다. 찝찔한 바람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니 목덜미가 찌르르하게 떨려왔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 경쾌한 음악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우리가 지금 도대체 어디에 와 있는 것인지, 우리를 둘러싼 멀끔한 차림의 이 사람들은 누구인지 머리가 멍해지면서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상한 기분에 부드럽게 찰싹이며 해변으로 밀려오는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앞으로 펼쳐진 먼 바다의 어딘가에 쿠바의 땅끝이 보일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문득 모든 기쁨이 수그러들고 짙은 그리움이 밀려왔다.   

  둥글게 이어지는 저 수평선만 넘어서면 우리가 지나온 땅들, 그곳에서 우리가 보아 온 그 모습 그대로 이 시간을 맞이하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의 시간을 가득 채웠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마음 가까이에 닿아있어서, 너무나 또렷해서... 그리움이 짙게 밀려왔다. 까미노를 마치고 포르투갈에 머물렀을 때처럼 말이다. 엘리스가 토끼를 따라 들어간 ‘이상한 나라’, 폴이 망치를 두드리고 빨려 들어간 그 ‘이상한 나라’에 모두 함께 그대로 있는데 우리만 현실로 툭 튀어나와버린 기분이 또다시 밀려왔다. 이제는 그곳들이 덤불로 덮여버리고 단단한 벽으로 막혀버려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또다시 찝찔한 바람이 휙 하고 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바다의 냄새인지 그리움의 냄새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하게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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