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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자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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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명 Nov 09. 2017

시베리아

거칠고 두터운 흙빛 몸뚱아리에서

은빛의 털오라기가 돋아난다.

강인한 등줄기를 덮어버린

가녀린 털오라기의 섬세함에

덜컥 겁이 난다.


나의 생명을 빼앗아가려는 것이냐

나의 힘을 뒤덮어버리려는 것이냐


눈보라를 휘감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달린다.

그러나 눈보라는 등줄기를 뒤덮어

자라나는 털오라기를 더욱 섬세하게 빛내고야 만다.


광활한 평야에 이르러 뿌연 숨을 몰아쉬며 포효한다.

우주를 울리던 포효마저 그르렁거리더니

털오라기 사이사이를 돌아나와

부드러운 바람소리가 되고 말았다.

괴로움에 겨워 몸뚱이를 비틀자

등줄기를 덮고 있던 눈바람이 부스스 허공으로 날아간다.

슬픔과 두려움의 눈물은 얼어붙은 강이 되었고

은빛의 털오라기는 더욱 가녀린 가지를 뻗어 올린다.

아!

아!

나의 몸뚱아리가 어찌 사라져가느냐!


광야를

내달리고

내달렸다.


지평선 너머로 드러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에 눈이 멀어

내달리기를 멈추고

둔덕 위에 드러누웠다.


잦아드는 숨소리에 맞춰 살랑이는 은빛 가지를

처음으로 마주보았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것이 아름다운듯도 하였다.

조금 더 몸을 움직여 햇빛에 비추어보았다.

사방으로 내달리며 은빛 털오라기를 흔들어보았다.

말갛게 개인 하늘로 털오라기를 곧게 세워

있는 힘껏 뻗어올린다.

올라간다.

올라간다.


어느새 흙빛의 몸뚱아리는 은빛의 털로 뒤덮여

강인하고도 아름다운 근육을 움직거렸다.

강한 생명력은 섬세하게 흔들리는 아름다움으로

하늘의 빛을 삼켰다.


달리고 달려라.

더욱 빠르게


너의 변모한 아름다움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오색의 왕관을 씌워 줄

모스크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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