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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주 Sep 15. 2020

볼펜 한 자루의 행복

내가 사랑하는 필기구


 우리 반에서 하이테크 펜을 쓰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0.3mm라는 말도 안 되는 두께의 펜이 있다는 것을 모두들 몰랐다. 아니, 펜의 두께가 어떠한지를 감지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사실 그 펜은 고등학생이던 언니가 과외선생님께 보상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아마 애원하고 애원해서 하루 이틀 정도 학교에 가져갔을 것이다. 하이테크 펜으로 한 노트 필기는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한 눈으로 보아도 번짐을 찾을 수 없는 깔끔함과 얇은 펜 두께로 생성되는 여백의 미란 주변 여중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너도나도 써보겠다며 빌려 갈 때 그 우월감과 자의식에 도취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얇고 끊김 없는 필기감을 구현하기 위해서 펜촉이 튼튼할 수 없었다는 것을 몰랐던 탓이었다. 알았어도 조심하라고 주의 주는 쩨쩨한 선구자가 되고 싶지 않았을 테지만. 고작 몇 시간 만에 볼펜이 고장 났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렸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그 펜이 언니가 아끼는, 무려 과외선생님이 하사하신 상품이었다는 것. 나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똑같은 펜을 구입해서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비싸기는 왜 이렇게 비싼지, 분명 뚜껑에는 200이라고 적혀있었는데 200원이 아니라 2,500원이었다니, 그 돈이면 토스트와 팥빙수를 먹어도 500원이 남는 돈인데, 여러 종류의 상실감과 허탈함을 한꺼번에 경험한 날이었다.

 친구들은 비싸고 잘 망가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에 모두들 등을 돌렸지만, 나는 그 손맛을 잊을 수 없었다. 다른 펜으로는 글씨가 그렇게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깔끔하고 빨리 마르는 잉크 펜을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 몫의 펜을 사기 위해 다시 문구점에 들렀고, 그렇게 볼펜 두 자루에 일주일 용돈을 탕진했다. 아무도 빌려주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그 이후로 나는 문구점에서 볼펜 매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신상 볼펜이 나오면 무조건 써보는 일종의 얼리어답터가 되었다. 글씨 쓸 일이 좀처럼 없는 지금은 학창 시절만큼 펜을 가리지 않지만 어쩌다 문구점에 가면 그때 그 여중생이 되어 테스트에 테스트를 거듭하여 가장 마음에 드는 볼펜을 하나 집어온다. 그러면 그 행복이 꽤 오래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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