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주 Jul 23. 2020

어쩌다 건져 올린 용기

정혜윤의 <어쩌다, 메모>

 어떤 사람들의 눈길은 머무는 반경이 넓고 그들의 생각은 그 시야를 가볍게 넘어 확장하며 영향력이 그 이상으로 퍼져나간다. 나는 내 삶만 보고 내 생각은 그 안에만 머물고 나 외의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이렇게나 가벼운데 말이다. 나는 내 삶만으로도 벅차고 이렇게 좁은 우물 안에서도 길어낼 수 있는 건전하고 희망찬 것이 거의 없는데 말이다. 왜 누군가는 앞서 보고 앞서 생각하고 앞서 이끌어가고 나는 항상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가야 하는지, 따라가는 것마저 왜 내겐 큰 용기가 필요한지, 나 자신이 조금 답답할 때가 있다.

 나는 정의롭고 싶은데 겁이 많고 평화롭고 싶은데 산만하다. 무언가 이루고 싶은데 너무나 안전하고 싶다. 아무렇게나 흘려보내는 시간에 미안해 책이라도 부여잡아본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거짓말처럼 정혜윤 작가의 책을.


그날 나는 그 당시 나를 자기연민에 빠지게 했던 비애,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나의 비애는 아무것도 안 하고 나를 아주 괜찮은 사람으로 남들이 알아봐 주길 원했다는 것이다. 나의 비애는 스스로 인정하고 존중할 만한 그 어떤 일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 초라함이 비애의 정체였다. 나는 이것을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채 눈물로 인정했다.
 “나는 너무 후져.”
              -‘나는 왜 메모주의자가 되었나’ 중에서


나는 너무 후진데 후지지 않은 척하는 게 더 후지다. 후지지 않아 보이게 쓰고 말하려 해도 그 가면이 얼마나 조악한지를 나는 알고 있다.


세상만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는 어두움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만 아는 것들-거의 이해하는 것이 없다는 것, 실수했다는 것, 후회스럽다는 것, 말만 앞선다는 것, 유치하다는 것, 속이 좁다는 것. 수시로 자기비하의 유혹에 빠진다는 것,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 칭찬에 중독되었다는 것, 중요해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 무조건 이기고 싶어 한다는 것, 돈을 심하게 밝힌다는 것, 남과 비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 비판을 감당 못 한다는 것, 지나치게 방어적이라는 것,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한다는 것.
 우리 안의 어두움이 다 나온다면 세상은 인류 멸망의 아침처럼 어두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슬퍼할 줄 아는 것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메모에 관한 열 가지 믿음’ 중에서


요즘 계속 비가 내려서 그런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가 문득 마음도 먹먹해진다. 내가 세상에 아무런 의미도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져서 초라해지지 않으려고 잡은 책에서 거짓말처럼 용기를 건져 올렸다. “나의 내일은 오늘 내가 무엇을 읽고 기억하려고 했느냐에 달려있다”는 문장에서 한동안 멈춰 있었다. 내 안에 괜찮은 것이 없다면 외부 세계에서 모셔 오면 된다는 그의 말에 오랜만에 책상 구석에 밀려나 있었던 노트를 꺼냈고 3개월 만에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작가의 이전글 부부싸움을 밤에 해야 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