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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Frame Jul 05. 2017

베네치아를 기억하다

#34. 마조레 성당 종탑에서

수상 버스를 타고 어디쯤엔가 떨어져 있는 섬들을 찾아갔다. 유리 공예품으로 유명하다는 곳은 비수기의 관광지에서 느끼는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열려있는 가게를 굳이 지나쳐서 철창으로 가로막힌 유리창에 바짝 달라붙어 공예품을 구경했다. 얼룩진 유리 뒤의 조각들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음속에서 짧은 단어들이 튀어나왔지만 어딘가에 걸리지 못하고 입김과 함께 떨어지고 말았다. 조금 더 있어 볼까 했지만 별 소용이 없는 듯 했다.

15.01.16, 베네치아, 부라노 섬

날이 춥지는 않았지만, 목도리를 고쳐매었다. 12번 수상 버스는 어부들의 마을보다는 그 가수의 뮤비 촬영지로 더 잘 알려진 곳으로 향했다. 에메랄드빛 운하를 사이에 두고 장난치듯 채색한 집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빨간색, 노란색, 핑크색, 파란색, 그보다는 시간과 바람에 씻겨 특정 색이라고 정의하기 힘든 그 어떤 흔적. 또는 자국. 인적을 찾기 힘든 거리엔 고양이들이 한가로이 노닐었고, 이따금 강한 바람이 불어와 모퉁이의 적색 페인트를 살짝 긁어냈다.

15.01.16,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 종탑

몇 번의 환승을 거쳐 궁전 맞은편의 성당에 도착했다. 눈 밑에 살이 처진 관리인에게 6유로를 내밀었다. 저 멀리서 온 동양인을 위아래를 훑어보는 눈빛에는 권태로움이 가득했다. 티켓을 받아들고 아무도 없는 종탑에 올랐다. 아래로는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났고, 위로는 아득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 잠들기 시작한 신기루 같은 도시에 주황색 불빛이 하나 둘 씩 떠오르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스케치를 마치고 폐장시간이 다돼서야 종탑에서 내려왔다. 힐끔 바라보는 관리인에게 수고하시라 인사를 건넸다. 기억에 새길 한 장면을 얻은 기쁨은 잠들 때까지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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