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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Frame Dec 09. 2017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03. 당신이라는 존재

그러니까 그 토요일은 당신과 내가 만난 지 1,000일이 되는 날이었다. 당신은 친구들과 제주도를 갔고 난 혼자 서울에 남았다. 누구 하나 서운해하지 않았고, 둘 다 그런 것에 무덤덤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찬거리를 위해 동네 채소 가게에 들러 콩나물을 샀다. 지난번 마트에서 이천 원어치를 산 것 같았다. 적당한 양이었길래 별 생각 없이 이천 원어치를 달라고 했는데, 양이 너무 많았다. 콩나물국을 끓이기 위해 큰 냄비에 가득 콩나물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도 콩나물은 많이 남았다. 콩나물무침을 큰 통으로 하나 가득 만들었다. 여전히 콩나물은 조금 남았다. 버리기가 아까워 까만 봉지에 넣어 질끈 묶어 냉장고에 넣었다. 수첩에 '콩나물은 다음부터 천 원어치만 사는걸로'라는 메모를 남겼다.


해가 저물어 가도록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밀린 집안일을 하고, 무엇인가를 읽고, 보고, 쓰기도 했다. 억지로 약속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저녁 즈음에 당신과 통화를 했다. 콩나물 이천 원어치에 대해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독립해서 살았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겠지. 집안일을 하고 오후 느지막히 하루를 정리해보는, 그리고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주일을 시작하는, 참으로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콩나물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당신이라는 존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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