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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율 Feb 20. 2022

4화_어른은 무엇으로 살아가나요?

악기를 배우는 것이 어른에게 주는 효용감,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감각

오은영쌤이 출연하는 육아 프로그램을 종종 본다. 언젠가 어린이의 자존감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작은 성공의 경험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조그마한 자기 확신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 그런것이 어린이의 자존감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그 프로그램에서 어린이는 늘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은 경험이었으며, 그것이 실패라 할지라도, 진전이 더딜지라도 그들의 세계에 마이너스란 없었다.   아이들은 항상 변화했다. 느려도 항상 나아갔다. 어린이는 적어도 우리보다는 쉽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커버린 어른은 무엇으로부터 자기 효용을 채우나. 무엇으로 위험하지 않은 작은 실패들을 쌓아 앞으로 나아가나.


언젠가부터 어떤 성취라고 할만한 것들이 내 세계에서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물론 내게도 언제나 해결해야 할 퀘스트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해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해내면 제자리이며, 실패하면 어딘가가 패여버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패임이 꽤나 마음 아팠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성실한 직장인이었고, 어떤 성실은 계속해서 패이고 닳는다는 뜻이다. 매일 그런것들을 반복하며 직장의 일들이 주는 작은 절망과 실패에 익숙해졌다. 그런 것들에 더 이상 실망하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가끔은 퍽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단단하다는 것은, 딱딱하다는 것.

웬만한 일에 울지 않고 앵간한 일들에 실망하지 않았으나, 어지간한 일 가지고는 마음이 늘어나고 부풀지도 않게 되었다.

딱딱하고 축소되고 작아진 나,

자신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나, 안전했지만 재미없었고,

슬프지 않았으나 커다랗게 기쁘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당장 쓸모없는 것들을 순전히 기쁨을 위해 혼자 계획하는 것, 노력해서 해내는 것, 느려도 해보는 것. 미래의 어떤 날을 기대하게 하는 것, 그런 종류의 성취와 기쁨과는 멀어진 사람이 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바쁘고 피로하니까요..... 그 바쁨과 피로의 정도는 너무나 지나친 것이어서 설명할 힘 조차도 없었다. 대신 변명거리는 언제나 차고 넘쳤다.

시간이 없었고, 세상이 엉망진창이었고, 또다시 실패하거나 실망하게 되는 것은 더더욱 피로했고.


그런 생각을 공기처럼 들이마시며 살던 와중에 늘 그래 왔듯 책을 한 권 읽었다. 누구보다 피로하고, 엉망진창인 세계 한복판에 있으며 매일 실망하는 사람의 이야기.


가디언 편집국장으로 일했던, 세상에서 제일 바쁜 남자 중에 하나인 엘런 리스브러저가 쓴 ‘다시, 피아노’


그는 1년 동안 쇼팽 발라드 1번 연주에 도전한다.

쇼팽 발라드 1번은 난곡중의 난곡으로, 비전공자가 그럴듯하게 쳐내기 매우 어려운 곡으로 알고 있다.


이 해에 가디언은 위키리스크 사태를 최초 보도했고, 중동 특파원이 납치되었고, 일본 대지진, 아랍의 봄……. 기타 등등... 듣기만 해도 끔찍하고 머리 아픈 사건과 함께하게 되는데..


잠잘 시간도 없는 와중에 우리의 작가는 꿋꿋이 매일 20분씩 연습하고, 음악가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여러 선생님들에게 레슨을 받는다.

그는 쇼팽 발라드 1번을 쳐내겠다는 하나의 목표에서 출발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그 배움을 다른 궁금증과 자신의 세계에 연결한다.



그는 계속 질문한다.


나는 어떤 연습 방법이 맞는 사람일까?

어떤 교육방법이 내게 맞는 것일까?

우리의 뇌는 음악을 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일까?


어른은 피아노를 치면서 피아노만 치지 않는다.

그는 뜨거운 불속에 있는 것처럼 바쁜 일상 와 중에도 여러 세계로, 자신의 작은 목적을 경험으로 확장시킨다.


다른 것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

어른이었지만 늘어나고 부풀고 성장한다.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 된다.


읽으면서 내내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렇게까지 일을 하면서 매일 피아노 연습을 하지 싶었는데,

다 읽고 나서는 피아노 연습이 있었기에 이 사람이 미치지 않고 이런 미친 세계를 견딜 수 있었겠구나 했다.


아무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세계 속에서 훈련을 통해서 아주 조금이라도 매일 나아진다는 감각 (물론 아마추어 한정),

진짜 너무 소중하고 희귀한 것이고, 어른의 자존감을 비추는 한줄기 빛과 같은 것.


플루트 소리는 여전히 아주 높은 확률로 듣기가 싫은데, 그래도 멈추지 않을 용기와 커다란 이유를 얻어내고 벅찬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듣기 싫은 소리가 플루트 연습 멈추지 않아…


비록 아름다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지만, 일주일 전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분명히 더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감각,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감각, 몸으로 익힌 것이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감각,

오랜만이라서 달고 기뻤다.

망하지 않고, 그래서 실패하지도 않는다.


대신 새로운 질문을 가진 사람이 된다.


10년 뒤에는 다른 악기도 배우고 싶을까?

러닝을 하면 폐활량이 좋아질까?

저 사람의 소리는 왜 저 사람의 소리가 된 것일까?


새로운 음악가의 이름과, 곡을 아는 사람이 된다.


질문을 잃고, 언제나 다른 사람이 낸 문제의 대답하기에 바빴던 삶으로부터 아주 조금은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실력은 거기서 거기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나아질 것이라 믿을 수밖에 없다.  처음 시작했을 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조금은 더 잘하는 사람인 것을 이미 목격해버리고 말았으니까.


내가 언제나 나의 가장 큰 보호자로서, 어린이의 성장을 어른이 목도하듯,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고 응원해주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큰 사랑이 다름 아닌 나에게 있어서,

그것 또한 자랑스럽다고 여기며.



'음악을 하면 친구가 생길 거라시면서 피아노 연습을 강요하신,
돌아가신 어머니 바버라 러스브리저께 바칩니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피아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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