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하마터면 집에 불이 날 뻔

오래된 주택용 분전반이 녹았다

by 거칠마루

올해 3월에 이사한 집은 지은 지 17년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번 이사 때 화장실 리모델링, 부엌 싱크볼 교체를 진행했습니다. 가끔 문이 잘 열리지 않는 새시(창호)가 남아있지만 그건 비싸니 살아보다 도저히 안 되면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집엔 더 이상 돈 들어갈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 2~3년(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하는) 아파트 전체 전기점검이 있어 오전 9~11시까지 2시간 동안 진행할 예정인데 그 시간에는 전기가 모두 끊기니 미리 분전반(우리가 흔히 아는 용어로는 두꺼비집)의 전원을 내려놓으라는 방송을 했습니다. 정전이 되었다 다시 전기가 통할 때 민감한 전자제품은 고장 날 우려가 있으니 점검 시간 5분 전에 미리 분전반의 전원을 차단했습니다. 점검이 끝나고 난 뒤 스위치를 올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살았습니다. 문제는 전기 점검이 끝난 그 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의 조명이 하루에도 2~30번 넘게 깜빡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주인이 형광등을 모두 LED로 교체했다고 들었는데 왜 이러지, 조명 고장은 아닐 텐데 생각만 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렇게 넘긴 지 하루가 지나고 1주일이 지나도 여전히 조명은 깜빡거렸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원이 빗발쳤습니다. 2주쯤 지켜봤는데도 좋아지지 않으니 관리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 온 기사님은 분전반을 열어보시더니 간혹 전기 점검 후엔 조명이 깜빡이는 집이 더러 있다. 대부분 분전반에서 전기 선을 고정해 주는 볼트가 제대로 조여지지 않아서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저도 전기에 문외한이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분전반이 설치된 곳에는 일체형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 작업하기 힘들었지만 기사님은 구부정한 자세로 고정볼트를 모두 조여주셨습니다. 이후에도 조명이 계속 깜빡이면 어찌할까요란 제 질문에 관리사무소 기사님은 글쎄요, 아마도 그땐 관련 업자를 부르셔야 될 것 같네요라는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제 생각엔 고정볼트를 조이는 걸로는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저 제 생각이 틀리길 바랄 뿐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토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원래 출근하는 날인데 아내가 쉬라고 해서 휴가를 쓴 날이었습니다(유부남들은 잘 아실 거예요, 제 휴가는 제 것이 아닙니다. 다 아내님의 지시를 받아서 쉽니다 ㅠㅠ ). 아침에 하이라이트에서 국을 데우고 있는데 갑자기 온 집이 정전됐습니다. 분전반을 열어서 확인했는데 이상하게도 메인 스위치는 그대로 켜져 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만져봤더니 전원이 들어오는 부분이 뜨겁더라고요, 다시 관리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전에 온 분이 아닌 다른 분이 오셔서 분전반이 집안에도 있고 엘리베이터 앞에 있다며 다시 확인하시더라고요, 이번에 작동된 분전반은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것으로 그게 전원을 차단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 스위치를 올리고 집안의 분전반 스위치를 올렸지만 정전된 상태는 그대로였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일이 벌어진 것 같았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 오신 분도 더 이상의 처치는 못한다며 아무래도 업자를 부르라고 하시더니 사무소로 내려가셨습니다.


이제 아내와 내가 관련 업자를 찾아봐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한참 네이버에서 누전차단기로 검색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전에 집수리하는 분 연락처를 알아놨다며 그분에게 전화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전반적인 집수리를 모두 하는 분인데 전기 자격증이 있어 이 분야도 잘 본다는 평이 있는 분이라 하더군요. 토요일 아침이라 반신반의하며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 안녕하세요, 분전반 전원이 나가서 연락드렸습니다. 관리사무소 확인 결과 집 밖의 분전반에서 전원이 차단됐고 집안의 분전반은 스위치를 올려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네요

업체 사장 : 우선 장갑 끼시고요, 집안의 분전반 스위치를 제가 부르는 대로 하나씩 켜보세요

나 : (시킨 대로 모두 했지만 전원은 여전히 들어오지 않음) 아, 그리고 집안의 분전반 메인스위치 쪽이 뜨겁습니다.

사장 : 아, 그럼 십중팔구는 집안 분전반이 오래되어 고장 났을 것 같습니다. 그 동네가 기본 15년 이상된 집인데 분전반 설치한 지 얼마나 되셨죠? 혹시 중간에 교체한 적이 있을까요?

나 : 17년 차고요, 아직 교체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혹시 집 밖 엘리베이터 앞 쪽의 분전반도 나갔을까요?

사장 : 제가 가서 확인해 볼게요, 부품이 없어서 상점에 들러 분전반을 사가야 하니 30분쯤 뒤에나 방문하겠네요


그제야 알게 됐습니다. 그동안 집안의 조명이 깜빡거렸던 이유는 분전반이 오래되어 그랬던 것입니다. 처음 오신 관리사무소 기사님 말씀처럼 고정볼트가 제대로 조여지지 않아 그런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집과는 거리가 먼 설명이었습니다. 집에서 전기가 차단된 과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오래된 분전반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함 → 그 상태로 죽 방치된 채 전기 사용량이 많아짐 → 전기를 차단하지 못하고 그 높아진 전력량으로 인해 전원을 공급하는 선이 녹아버림 → 집안의 분전반 사망 → 집안의 분전반이 역할을 하지 못하자 밖에 있던 분전반이 제 역할을 수행해 전기를 차단함


업체 사장님은 밖에 있는 분전반의 점검을 마치더니 이건 고칠 필요가 없고 집안의 분전반만 교체하면 된다는 설명을 하며 하마터면 집에 불이 날 수 있었는 데 정말 다행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고장 난 시간이 토요일 아침이어서, 그리고 제때 수리를 받을 수 있어서, 또 제가 휴가라 집에 있는 날이어서 또한 주님께서 우리 집을 지켜 주셔서 무사히 한 고비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15년 가까이 전세살이를 하며 이것저것 집수리 전반적인 과정을 모두 경험했다 자부했는데 설마 이 분전반이 교체대상인 건 꿈에도 몰랐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사는 집이 15년쯤 됐는데 분전반을 교체한 적이 없고 조명이 깜빡인다 그럼 99% 분전반 교체하셔야 됩니다. 아니면 집에 불이 날 수 있습니다.


분전반 이미지 출처 : 네이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