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마리
평소와 다름없는 저녁이었습니다. 저녁 8시 무렵, 우리 집은 아주 평온한 상태였습니다. 중 2, 초 6 두 아들과 아내는 저녁을 다 먹었고 전 다이어트를 위해 실내사이클을 타고 있었습니다. 거실에 있는 TV에서는 MBC나 SBS의 뉴스가 흘러나오고 아내는 식탁 겸 책상으로 쓰는 1.6m 정도의 탁자에 놓인 반찬통과 밥그릇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내의 전화기가 울렸습니다. 전화기를 살피더니 뜻밖의 얘기를 꺼냈습니다.
아내 : 00가(처남의 이름)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4일 동안 마리 좀 맡아 달라는데?
이 말이 끝나자마자 두 아이가 소리칩니다.
아들 1, 2 : 아싸, 마리 온다!!!!
큰 아이 : 아빠도 고양이 좋아하니까 오라고 해요
작은 아이 : 마리 정말 좋아, 삼촌보고 얼른 데리고 오라고 하세요
나 : 나도 좋아, 콜
아내 : (화들짝 놀라며) 자기, 고양이 털 날리는데 괜찮겠어? (제가 우리 집 청소 담당입니다. 바닥에 먼지나 머리카락 등 부스러기 있는 것 무척 싫어합니다) 고양이 싫어했잖아!!
두 아이가 동시에 얘기합니다
아이들 : 아니에요, 아빠 고양이 좋아해요, 아빠가 전에 고양이 동영상 보는 것 봤어요.. 아마 하루에 한 번씩은 볼걸요? 아빠 고양이 좋아하죠, 그렇죠?
나 : 언제부턴가 좋아지더라고,,, 원래는 강아지만 좋았는데,,, 나중에 한 번 키워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그렇게 마리(처남이 키우는 스코티시폴드, 암컷 4살)의 임시보호가 결정됐습니다. 처남이 내일 직접 와서 마리와 사료, 여러 용품들을 놓고 고양이 키우는데 필요한 것을 설명해 준다고 얘기가 마무리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근무라서 하루가 지난 금요일 오전이 되어서야 마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그동안 1년에 1~2번 정도 마리를 만나왔습니다. 처남 집에 갈 때면 우리를 낯설어한 마리가 도망을 치긴 했어도 곁을 내줘 쓰다듬거나 먼저 다가와서 우리 냄새를 맡는 등의 행동을 보여 마리에게 낯선 존재는 아니겠지라고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와 지낼 4일 동안 고양이를 좋아하는 저와 아이들의 사심을 듬뿍 채울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계획은 항상 계획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마리는 처남이 떠나자마자 후다닥 화장실 변기 뒤편으로 숨었습니다.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몸을 바르르 떨며 숨어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자는 밤에는 잠시 거실로 나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듯 보였지만 우리가 일어난 후엔 화장실 변기 뒤쪽이 제 집인 듯 숨어있기 바빴습니다.
아이들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도 하악질을 하거나 그르렁댈 뿐이었습니다. "마리"하고 이름을 부르며 손을 갖다 대면 원래 손가락 냄새라도 맡는 녀석이었는데 이젠 냥냥펀치를 날리기 일쑤였습니다. 마치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아이 같아 보였습니다. 워낙 식음을 전폐하니 하루에 1번 급식기에서 자동 배식되는 사료는 눅눅해져 휴지통으로 직행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아이들이 츄르(챠오츄르의 줄임말입니다. 워낙 제품이 유명해서 츄르라고 불립니다. 스틱형 액상 고양이 간식입니다)를 먹이려고 노력하면 그때만 간신히 받아먹을 뿐 여전히 우리와 어울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하소연이 이어졌습니다.
아내 :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서 그런가? 자기 집이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숨어있기만 할 줄은 몰랐네, 어떻게 3일 내내 숨어만 지내냐?
우리 가족 모두 급변한 마리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안타깝게도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3일째 밤이었습니다. 고양이 때문에 큰 아이와 저는 안방에서 자고 아내와 작은 아이는 다른 방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막 잠들려는 찰나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둘째 : 아빠, 지금 마리가 거실로 나왔어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어요, 얼른 나와보세요
나 : 아냐, 지금 아빠가 나가면 놀라서 다시 숨을 거야, 아빠 그냥 여기 있을게
아내와 둘째가 기뻐하며 마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두 사람 모두 전화기로 마리의 모습을 담기 바빴습니다. 잠이 많은 저와 큰 아이는 그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서서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렇게 건진 마리의 사진입니다.
새벽 2시쯤인가 더워서 자다 깼습니다. 고양이가 들어올까 봐 아내가 안방 문을 닫아놔서인지 목덜미에 땀이 흥건했습니다. 물을 마시려고 안방 문을 열었더니 마리가 거실 탁자 밑을 거닐다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처남이 알려준 것처럼 "마리"하고 이름을 부르며 손을 앞으로 가져갔습니다. 어라, 웬일로 마리가 다가와 제 손 냄새를 맡습니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조심조심 마리의 정수리를 만져봤습니다. 정수리를 긁어주니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꼬리만 빼고 등을 조심히 쓰다듬었습니다. 한 20초쯤 제 손길을 느끼더니 "이제 그만"이라는 것처럼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구석으로 가버렸습니다. 새벽의 횡재였습니다.
4일째 아침, 마리가 돌아갈 날이 되었습니다. 마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이름을 부르며 조심히 다가갔지만 구석에 숨어있는 마리에게 바로 냥펀치를 얻어맞았습니다. 아프진 않았지만 새벽에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 손길을 거부하는 마리였습니다. 모든 일은 마무리가 좋아야 하는데 마지막 순간조차
차디찬 마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출근해야 했습니다.
아, 나의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1. 작은 아이가 가져다준 박스에 들어간 마리 2. 선반 뒤에서 째려보는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