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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휴가 Feb 28. 2023

리투아니아인들이 팬케이크를 원 없이 먹는 날

우즈가베네스(Užgavenės), 기름진 화요일


리투아니아에는 일 년에 딱 하루, 가 터지도록 팬케이크 는 날이 있다. 바로 부활절을 40일 남겨두고 시작되는 사순절 바로 전날의 화요일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나신 예수의 부활을 기다리며 회개하고 금식하며 숙연한 마음으로 보내는 사순절 기간수요일의 금식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그 금식이 시작되기 전 날 집에 있는 음식들을 남김없이 먹 특히 팬케이크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다. 


부활절 날짜가 매년 바뀌듯이 이 날도 보통 2월 중순부터 3월 초 사이의 어느 하루가 된다. 그러니 팬케이크를 먹는 날을 알려면 사순절이 언제인지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또 부활절을 계산하는 방법부터 알아야 한다. 춘분(3월 20일 혹은 21일) 다음에 돌아오는 첫 음력 15일 이후의 첫 주일이 바로 부활절이다. 그리고 그 부활절로부터 일요일을 제외하고 40일을 거꾸로 세면 수요일에 딱 맞아떨어지는데 그것이 사순절의 시작이다.


영미권에서는 일명 팬케이크 데이로 불리기도 하는 기름진 화요일 Fat Tuesday을 리투아니아에서는 우즈가베네스 Užgavenės라고 부른다. 구체적인 풍습은 다르지만 러시아의 마슬레니차 Масленица에 해당되는 날이다. 러시아의 마슬레니차Масленица도 버터를 뜻하는 마슬라масло로부터 변형된 단어이므로 슬라브인의 화요일도 느끼하고 기름지기는 마찬가지이다.



리투아니아식 부침개 블리나이


팬케이크는 리투아니아의 가장 대표적인 밀가루 음식으로 블리나이 Blynai라고 부른다. 베이킹 소다나 코티지치즈 등을 넣어 부풀게 해서 먹는 도톰한 팬케이크도 있지만 보통은 얇은 전병처럼 만들어서 잼을 바르기도 하고 뭔가를 넣고 접거나 돌돌 말아먹는다. 리투아니아인에게 국자를 타고 흘러내리는 팬케이크 반죽 농도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것인지 평소에 부엌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밀가루와 물, 포크 하나만 쥐어주면  뭔가에 홀린 듯 레너드 번스타인에 버금가는 열정적으로 몸짓으로 반죽을 휘저으며 꽤 괜찮은 팬케이크를 뚝딱 만들어낸다. 리투아니아인이 오랜만에 고향집에 내려갔다면 신발을 벗고 짐을 내려놓는 사이에 엄마는 이미 팬케이크 팬을 예열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며칠간 고향집에서 신선놀음을 하다가 엄마가 꺼내놓은 잼단지나 오이피클 병을 주섬주섬 가방에 챙기며 집 떠날 채비를 하는 순간 이미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엄마의 팬케이크가 자리 잡고 있을 거다.


더 이상 일상적일 수 없는  팬케이크를 또 특별히 왕창 먹어줘야 하는 날이 있다는 것에 간혹 웃음이 나오면서도 일 년의 절반은 혹독한 겨울이요, 빈번한 화재에 흉년에 시도 때도 없이 역병이 돌던 중세의 지난한 삶을 떠올리면 일 년 중 하루만이라도 배불리 먹자는 그 전통도 이해가 된다. 게다가 밀가루와 물만 있으면 만들 있는 음식이니 팬케이크야 말로 시대를 막론하고 서민의 식탁을 채우는 더할 나위 없이 질박한 음식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지만 무엇이든 넣을 수 있다.


그리하여 올해 우즈가베네스는 2월 21일이었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팬케이크를 만들었다. 지난주에도 지지난주에도 만들었던 팬케이크인데 마치 일 년 전 '기름진 화요일'에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것 마냥 팬케이크에 관한 지난 한 해의 모든 기억을 리셋한 채로. 어떻게 만들어도 늘 똑같은 그 팬케이크가 굳이 오늘따라 심술을 부려 눌어붙기라도 할까 봐 마음을 졸이며 더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다.



밀가루(100g):우유(250ml):버터(25g):달걀(2개)


팬케이크 레시피는 집집마다 다르지만 난 보통 크레페 반죽으로 만든다. 계량하지 않고 반죽 농도만 보고 만들어 내는 내공은 아직 없다. 다행히 지금의 크레페 공식에 꽤 만족한다. 밀가루(100g):우유(250ml):버터(25g):달걀(2개) 비율에서 먹는 양에 따라 동일한 비율로 늘리거나 줄인다. 달걀 때에 따라서는 하나 도덜 넣는다. 우유 밀가루 달걀을 섞은 반죽에 녹인 버터를 넣어서 잘 저어준 후 국자로 떠서 빠른 속도로 팬을 움직이며 팬 전체를 덮는다. 반죽에 버터가 들어있기 때문에 따로 기름을 두르지 않아도 절대 눌어붙지 않는다. 버터가 없다면 반죽에 기름을 조금 넣으면 된다.


이날만은 아이들도 또 팬케이크야? 라고 되묻지 않는다.


이날은 보통 유치원에도 학교에도 팬케이크를 가져간다. 자기가 먹을 것과 친구들과 나눠 먹을 것을 양껏 챙겨간다. 오랜 경험으로 내가 습득한 팬케이크 굽기에 관한 팁이라면 전날 저녁에 왕창 만들어서 산처럼 쌓아 놓는 것. 그리고 다음날 아침 살짝 데우면서 속에 뭔가를 넣어서 원뿔모양으로 접거나 김밥을 말듯 돌돌 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 장 구우면 쪼르륵 달려와서 한 장씩 들고 사라져서 다 같이 둘러앉아서 먹기는커녕 내내 서서 굽기만 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물론 아침에 방해 공작을 펴는 사람이 없다면 바로 만들어 먹는 것이 가장 좋다. 갓 구운 팬케이크에는 설탕만 솔솔 뿌려 먹어도 정말 맛있다.


팬케이크 하면 초코크림이나 시럽을 뿌리고 달달한 과일을 넣어서 먹는 모습이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볶은 다짐육이나 버섯을 넣기도 하고 심지어 닭의 심장이나 간을 익혀서 잘게 다져서 넣는 등 그 속 내용물은 무궁무진하다. 리투아니아의 식당에서 팬케이크를 먹는다면 햄치즈 토핑이거나 잼과 사우어 크림 조합일 확률이 높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크림에 졸인 꾀꼬리버섯 조합. 루콜라 모짜렐라 조합 등등이다.


바로 구워낸 팬케이크에 버터칠을 하면 좋다.


누구에게든 이민 생활은 타협 일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나 역시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스스로를 세뇌하는 거의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정신 승리하며 식성과 입맛을 바꿔왔다. 크레페 반죽에 강낭콩 앙금과 크림을 넣으니 붕어 싸만코에 필적한 맛이 난다 혼자 감탄한다.


딜버터를 바르고 부추부침개라고 우긴다.


딜버터를 바르고 돌돌 말자 빼도 박도 못하게 부추부침개 맛이 난다고 또 감탄한다.


유치원 아이들이 만든 가면들과 우즈가베네스 행사에 참가한 진지해서 웃픈 사람들의 모습


우즈가베네스는 팬케이크를 먹는 날이기도 하지만 축제의 본질은 사실 좀 더 심오하다. 바로 겨울과 작별하고 봄을 맞이하는 축제인 것. 절기상으로 입춘과 우수가 포함된 2월이 딱 그럴만한 시기인 것이 2월이 되면 정말 내리쬐는 태양의 농도가 1월과는 사뭇 다르며 날씨가 따뜻해질락 말락 하는 흐름이 반복되는데 이때 촐싹맞게 어머 겨울이 끝났나 봐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보란 듯이 다시 추워진다. 우즈가베네스는 그 꽃샘추위를 이겨내고자 하는 카니발이자 겨울을 몰아내고 봄을 맞이하는 계절의 문지방과 같은 날이다. 이날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최대한 기이하고 무서운 표정의 가면을 만들고 최대한 평범하지 않은 의상으로 치장을 한다. 추위가 기겁을 하고 줄행랑을 치도록 말이다.

 

우즈가베네스를 상징하는 몇 가지 캐릭터들이 있는데 겨울이 끝나지 않길 바라는 라쉬니니스 Lašininis와 봄을 열망하는 카나피니스 Kanapinis이다. 라쉬니니스는 돼지비계를 뜻하는 단어 라쉬니아이 Lašiniai에서 파생된 단어로 과식과 게으름의 상징 얼굴에 살이 오를 대로 올라있다. 반면에 카나피니스는 삼을 뜻하는 카나페 kanapė가 그 유래이므로 비쩍 말라서는 삼 줄기를 머리에 칭칭 휘감고 있으며 비계덩어리를 쫓아내려고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다. 이 둘이 카니발 기간 동안 맞붙어 싸우는 풍습이 있는데 그때 비계덩어리가 이기면 겨울이 연장되고 카나피니스가 이기면 봄이 온다는 식이다. 올해는 아무래도 비계덩어리가 이겼나 보다. 우즈가베네스를 기점으로 보란 듯이 눈이 오고 다시 추워졌다.


우즈가베네스의 절정

 

또 다른 주요 캐릭터라면 풍요를 상징하는 모레 Morė이다. 우즈가베네스는 보통 커다란 모레 인형을 불태우면서 끝이 난다. 풍요의 상징을 불태우다니 이상하지만 그렇게 액땜을 해서 지긋지긋하게 달라붙은 겨울을 떼어놓고 인형을 불태우고 남은 재들은 풍년을 기원하며 얼어붙은 들판에 뿌린다. 세상의 많은 축제들은 뭔가를 불태우지 않으면 끝이 나지 않는다. 특히 리투아니아 역사는 화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쩌면 숲도 많고 목조건축이 일반적이었던 중세시대에 축제의 클라이맥스에서 불이 옮겨 붙던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해보게 된다. 이런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식탁 앞에서 체면을 차리기란 불가능했을 거다. 그래서 이날 배불리 먹지 않으면 일 년 내내 굶주리고 이날 일을 많이 하면 일 년 내내 일만 해야 할 운명이 생기니 이 날은 충분히 놀고 배부르게 먹어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드는 가면


우즈가베네스가 돌아올 때마다 리투아니아 아이들은 가면을 만든다. 그런데 이중 단연 무서운 것은 놀다가 수차례 깨져서 실리콘으로 땜질하고 철사로 꿰매 겨우 붙들어 놓은 후레쉬맨 가면이다. 우즈가베네스를 맞이하여 최대한 무서워져야 했던 하회탈에 아이는 심지어 피눈물을 그려 넣었다. 만 킬로미터가 넘는 대장정 끝에 이곳에 자리 잡은 이들이 올해도 부디 비계덩어리와 싸워 이겨 봄을 몰고 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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