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듬 Aug 04. 2020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 밥이 됐다.

결론에 도달했다. 원서를 내기로 했다. 나의 고민이 계속 되던 7월 말, 만약 내가 원서를 내게 된다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 헐레벌떡 31일 전에 이수가 가능한 원격 연수를 신청해서 들었는데, 그 노력을 정말 써먹을 때가 온 것이다.


당장 5-6쪽짜리 계획서를 써야 했다. 무엇을 써야 할지 조금도 감이 오지 않아서, 정보 공개 사이트에 들어갔다. 정부에서 생산한 공문들이 오픈소스마냥 펼쳐져 있는 공간(http://open.go.kr). 진로 교육, 진로 진학 등의 단어를 검색해서 전국 각종 학교의 계획서를 얻어냈다. 접근이 불가능해서 볼 수 없는 경우도 많았지만, 몇 곳의 계획서들을 보며 계획서의 틀을 잡는 데 도움을 받았다. 학교마다 조금씩 결은 달라도 공통적인 부분들이 있었는데 진로 교육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거나 지역 사회의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여 지역 사회와 학교의 연계 지점을 만들어 주겠다는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나도 주요 내용들을 빠짐없이 계획서에 집어 넣었다.


계획서는 말 그대로 '계획'이기에 막연하더라도 써 볼 만했는데, 진로 교육 실적은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교과 교사로 살다가 진로 전담 교사가 되겠다고 나섰는데, 교과 교사로 살던 중에 내가 진로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적으라니? 당장 뚝딱, 하고 진로 교육 실적을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상황이니 특별한 내용을 담지 못하고 3학년 담임을 6년 동안 해 온 이야기를 구구절절 진로 교육 실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실적을 적으면서,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차피 안 될 것 같은데 신청해서 뭐 하나 싶은 생각이 자꾸 들어서 서류를 보낼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다 A4 6장 쓴다고 쓰고 지우고 골머리 썩은 게 아까워서 일단 서류를 내기로 했다. 오전에 교감 선생님께 서류를 전하고 공문 발송이 되었겠거니 했는데, 퇴근하려던 차 확인해 보니 제출 공문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감 일시가 가까워져 가는 상황에, 교감 선생님은 공문을 발송하지 않고 출장을 가 버리신 상황. 서류를 낼까 말까 혼자 고민할 때는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 같은 마음이었는데, 막상 서류를 못 낼 상황에 되자 악착같이 내야겠다 싶어졌다. 퇴근을 미루고 행정사님과 교감 선생님과 연락해 가면서 겨우 마감 시간 전에 서류를 제출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 보지, 뭐.


그리고 9일 후. 내 서류는, 뚝딱. 밥이 되어서 돌아왔다.

진로진학상담교사 선발 명단 알림에 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



- 연수 기간 중 중도 포기 불가

- 전과 발령 이전까지 명예퇴직, 휴직, 파견 불가

- 자격 취득 후 순위에 의거 결원요인 발생시 전과하여 임용 발령함.

- 진로진학상담교사 최종 선발자는 서약서를 작성하여 제출할 것.


[각서]

본인은 2020년 진로진학상담교사 선발합격자로서 자격을 취득한 이후 전과희망원을 제출하여 전과하며, 교과 재변경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을 서약합니다.     



오히려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얼마만의 '새로운 시작'인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장담해야 한다는 것이 두렵게만 느껴졌다. 혹시라도 내가 앞으로 휴직을 해야 하면 어떡하지, 막상 전과를 했는데 만족스럽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태산 같이 밀려왔다. 

하지만 곧, 기껏 부전공 자격 연수 대상자로 선발되었는데 겁 먹고 해 보지도 않고, 해 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약서를 출력해 서명을 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