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진의 계절, 가을
가을에는 유독 마음이 분주하다. 책을 읽고 쓰기 좋은 계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착실하게 책을 펼치고 부지런히 글을 써나가기에도 짧은 이 계절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글이 아닌 다른 걸 쓰고 싶게 한다. 무엇 하나 헛투루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언제나 아끼고 숨기고 참는 게 익숙한 나를 기어코 헤프게 만드는 계절이다.
노랗게 익어가는 거리에서 예정에 없던 긴 시간을 쓴다. 마치 헤매는 것이 목적인 사람처럼 같은 구역을 뱅뱅 돌기도 하고,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느린 걸음으로 길 위를 샅샅이 살피기도 한다. 무엇을 찾고 있는 중이냐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아마도 ‘내가 이러는 이유’라는 멍청한 답을 할 것이다. 그것 말고는 줄 수 없는 답이 없는 때가 있다. 그때는 꼭 일 년을 주기로 돌아오고야 만다.
수십 수 번을 마주해도 가을은 언제나 처음처럼 생경하다. 언제 어디서든 똑 부러진 느낌표와 단호한 온점을 찍기 위해 애쓰던 나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온 마음을 풀어헤친 채 물음표 가득한 거리를 활보하는 내가 대신하는 계절이다.
가을에는 늘 궁금한 것들이 는다. 평소라면 휴대폰을 들어 간편하게 해소하면 그만이었지만 이전에는 없던 용기가 생긴다. 기꺼이 몸소 시행착오를 겪어낼 용기, 기대를 실망으로 맞바꿔도 괜찮을 용기 같은 것이 솟는다. 그런 용기는 결국 지난날들의 내가 모아둔 시간과 돈, 그리고 마음을 쓰게 한다. 가진 것 없는 내가 탕진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는 몇 안 되는 순간일 거다.
오늘의 탕진은 갑작스럽게 뚝 떨어진 기온 때문이었다. 늦은 준비로 분주했던 아침에 집어 든 것이 하필 긴 까만 코트였다. 숨을 헐떡이며 탄 전철에서 손잡이를 겨우 붙잡았을 때 소매 끝에 매달려 있던 흰머리 몇 가닥을 발견한 탓이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새치를 오늘은 그저 무심히 털어낼 수 없었다. 달리는 열차 창으로 비치는 피로한 내 얼굴이 미소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미소는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이다. 미소라는 화사한 이름과는 달리 춥고 외로운 길을 걷고 또 걸었던 여자. 찬바람에 하얗게 센 긴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휘날려도 허름한 롱코트를 잔뜩 여미고 꿋꿋이 걷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던 미소가 문득 그리웠다. 만난 적도 없이 그리워지는 인물들에는 늘 속수무책이 되고 마는 나는 소매 끝에 매달린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실려가기 전에, 오늘 밤은 위스키를 마시겠다고 결심했다.
연희동에 있는 작은 바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내가 왜 이곳에 와있는지 몰랐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미소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던 게 왜 다름 아닌 위스키였는지, 그게 왜 지금 사무치게 알고 싶어 졌는지 몰랐다. 언제나 그랬듯 가을은 내게 까닭 없는 호기심이라는 숙제를 내어주곤 했으니까. 우선 호기심을 해소하는 게 먼저였다.
용감했던 결심과는 달리 나는 꽤 시간을 끌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내게 위스키라는 세 음절은 단번에 입 밖으로 내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낮은 조도에 고요한 공간이 아직 조금 어색하기도 했고 위스키라는 숙제를 너무 빨리 털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여러 책 속에 등장하는 술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메뉴판을 천천히 읽고 나서 위스키 대신 보드카 토닉을 주문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미도리가 가끔 사는 게 괴로울 때면 찾았다는 보드카 토닉을 마시면서도 나는 미도리가 아닌 미소를 떠올렸다. 가끔 하는 선택이 아닌 매일 필사적으로 찾았던 미소의 위스키는 내 물음표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차가운 잔을 비워낼 때마다 호기심은 더 커졌다.
빈 잔을 매만지는 내 얼굴에 호기심과 망설임이 비쳤는지, 사장님은 궁금한 게 있다면 편하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미소와 위스키 이야기를 했다. 생각과는 달리 조금 우물쭈물하긴 했지만.
위스키가 처음이라는 나를 위한 사장님의 배려로 가게에 있던 위스키들의 향을 천천히 맡아볼 수 있었다. 여러 향을 맡아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기분은 달랐다. 이제 정말 숙제를 천천히 음미하며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스키의 첫 모금의 인상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두 번째는 향긋했다. 세 번째는 서글펐다. 40도가 넘는 위스키를 아주 조금씩 여러 번 나누어 홀짝이면서 나는 이런저런 문장을 썼다. 가지고 있는 종이라곤 오후에 다녀온 병원에서 받은 진료 내역서뿐었지만 어둑한 바 안에서는 모두가 서로에게 무감했다. 덕분에 나는 두 장의 이면지를 반으로 갈라 네 페이지를 만들고 그 안을 모두 산발적인 감정으로 채웠다. 혼잣말과 낙서에도 나름의 두서를 찾는 직업병은 위스키의 뜨거운 첫 모금에 사라져 버렸다.
화르륵 타버릴 것 같은 속을 안으며 미소에게 위스키는 찬 겨울을 버틸 온기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가난한 그녀가 가진 허기와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누군가와 마주하며 하는 따듯한 식사가 아닌 구석진 자리에 앉아 홀로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이지 않았을까. 아주 조금씩 느리게 비워내는 그 시간이 그녀에게는 찬바람을 피하는 유일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줄어드는 잔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화기애애한 사람들을 둘러보던 미소가 외로울 줄로만 생각했는데, 오늘 그녀를 따라 빈 잔을 한번 주변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고 나니 미소가 느꼈던 건 어쩌면 안도와 안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꿈결처럼 짧은.
미소에게 위스키가 짧은 위안이었더라면 내게 위스키는 무엇일 수 있을까. 물음표의 방향이 나를 향했다. 낯선 공간에 익명의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며 사유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도무지 어떤 마음으로 쏟아졌는지 모를 종이 위의 문장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과 몇 십분 전에 글을 썼던 나를, 지금의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취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떤 글은 그저 쓰는 것만이 목적이기도 하다는 걸 너무 오래 잊었고 있었다. 엎질러진 문장들을 해독하는 대신 나는 계속 쓰기로 했다. 오늘 밤만큼은 무작정 쓰기로 했다. 내가 쓴 글들이 앞뒤가 맞는지 아닌지 상관하지 않고, 내가 쓴 종이가 병원 진료내역서라는 걸 누군가 알아차리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 오늘의 몫으로 주어진 일들이 내일에게 환영받을 수 있을지 신경 쓰지 않고.
일 년 중 단 하루, 가을의 찬바람이 겨울의 얼굴을 하는 날만큼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소심한 탕진을 하기로 했다. 미소는 매일 밤 위스키를 마셨지만 나에게는 고작 하루였다고, 아무도 묻지 않는 변명을 내놓으면서.
가진 것 없는 미소와 가진 것 없는 내 입 안을 잠시나마 근사하게 머물다가 사라진 위스키의 잔향을 복기하면서 한참을 걸었다. 찬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