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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관우 Nov 04. 2019

이것도 악플이야?

말이 칼이 될때

2019년 10월 14일 오후, "조국 법무부 장관 사퇴" 속보가 터지고 1보, 2보를 거쳐 상보가 나오기도 전에  "설리 자살" 뉴스가 전해졌다.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시선은 포털 댓글로 향하고 있다. 언론과 사람들은 댓글의 여론 왜곡 의혹과 악플 부작용을 지적하며 대책을 요구했다.


댓글의 순기능과 더불어 사회적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정의하기 쉽고 그래서 기술적인 조치도 해온 여론 왜곡 이슈와는 다르게 악플은 사회적인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일을 하면서 댓글을 많이 보게 된다. 주관적으로 판단하자면 대부분의 댓글들은 ‘악플'이다.

댓글은 쓰기 쉽다. 쉬워도 너무 쉽다. 사람들은 쉽게 의견을 빙자하여 댓글을 배설한다. 우리가 배설하는 것들이 그러하듯 사람들은 굳이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될 것들을 댓글창에 남긴다.


이런 악플들에는 인신공격성 욕설 댓글들도 있지만 감상을 표현한다는 '대의'로 당사자에게 상처를 주는 덤덤한 댓글들도 있다.


"xxx는 관상부터 별로였어, TV에서 안 봤으면 좋겠다."

"이래서 여경들은 필요가 없어."

"동성애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호모들은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네...;"


그럼 어디서부터 악플일까?

감상이나 의견을 내비치는 댓글들인데 악플로 규정하고 규제할 수 있을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도 괜찮은 걸까?


표현의 자유는 중요한 의제다. 표현의 자유는 권리 중의 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권리 주장의 출발점이다.


이런 표현의 자유는 옹호하면서 동시에 혐오표현을 적절히 규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었다. 딜레마처럼 보이는 이 과제를 풀려면 일단 규제되어야 하는 혐오표현이 무엇인지 정교하게 개념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연한 기회로(파트장님이 사주셨다) "말이 칼이 될때"라는 책을 보았다.


이 책의 저자는 홍상수로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법과 인권에 관련된 한국 사회 이슈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학자다.


홍상수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명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혐오표현'을 역사적, 학술적, 법리적 관점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정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을 혐오표현이라 하며, 소수자를 '실질적인 정치, 사회적 권력이 열세이면서 공통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라고 정의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약자를 배려하라."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살아왔지 않는가?

그런데 소수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멸시, 모욕, 위협하며 차별적이고 적의를 가진 표현으로 선동한다니.

혼나야지.


 "동남아 출신들은 게으르다", "조선족들은 칼을 가지고 다니다가 시비가 붙으면 휘두른다." 같은 편견의 말들이 별다른 제지 없이 확산된다면 어느 순간 사실로 굳어지고 이 당사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편견을 가지고 바라볼까 두려움에 빠진다. 나아가 사람들이 혐오 섞인 편견을 그대로 믿어버린다면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과 같은 증오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


결국 혐오표현의 잣대는 그 표현으로 말미암아 당사자가 공포감을 느끼고 그 표현으로 야기되는 불상사가 예상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즉, 상대적인 다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은 그 표현으로 어떤 불상사를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혐오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남학생들에게 "남학생들은 매일 스마트폰으로 스포츠카나 구경한다. 그래서 불행한 거다"라고 말하거나 백인에게 "덩치만 크고 미련한 백곰 같은 놈들아"라고 하는 표현과 같이 다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표현은 대개의 경우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표현과 같은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여기서 '소수자'라고 한정한 혐오표현의 맹점이 보이기는 했다. 혐오표현을 받는 당사자는 '소수자'만 가능하다는 것은 '다수자'는 '소수자'에게 위협을 받지 않는다 라는 전제를 가져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소수자의 증오가 다수자에게 위협이 되거나 이로 야기된 증오 범죄가 없을까? 테러리즘은 대표적인 소수자의 증오 범죄이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수역 사건은 남혐에서 출발한 사건 아닌가?


여하튼 다시 돌아와 저자는 '남혐', '개독'과 같은 현상은 남성과 기독교가 다수자인 우리 사회에서는 표현이 야기하는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혐오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김치녀', '된장녀'는 혐오표현이지만 '한남충', '루저', '소추'는 혐오표현이 아니다.

나는 남성으로서 남성을 일반화하고 편견을 조장하고 모독하는 언행은 기분이 좋지 않지만 이 행위로 차별과 폭력과 같은 강력 범죄에 피해자가 될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냥 좀 씁쓸할 뿐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권리 중에 권리인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면서 법적으로 강력하게 제지되어야 할 혐오표현의 기준은 그의 주장처럼 "범죄화 된 역사가 있거나 위험이 있는 표현들" 이란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이로 말미암아 소수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두려움이 없고 다수자는 소수자의 상황을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반창고로 복원된 현수막


2016년 서울대 성수자 동아리에서는 "관악에 오신 성소수자, 비성소수자 신인생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붙이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이 현수막은 찢어진 채 발견되었다. 누군가 예리한 칼로 훼손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성소수자 학생들은 물리적으로 직접 공격당하는 느낌을 받고 두려움에 싸였을 것이다.


성소수자 동아리에서는 현수막을 다시 제작하는 대신 학생들의 연대를 호소했다. 중앙도서관 옆에 찢어진 현수막을 걸어놓고 반창고로 붙여달라고 했다. 현수막은 500명 이상의 학생들에 의해서 복원됐고 성소수자 학생들의 마음도 조금 회복됐을 것이다.


이런 소수자에 대한 혐오 범죄는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우리나라는 아직 '혐오표현'에 대한 차별 금지법이 제정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위와 같이 실질적인 폭력 행위가 있고 위협이 있더라도 차별 금지법으로 이를 처벌할 수 없다. 하루빨리 차별 금지법이 만들어져 "편견-> 혐오표현-> 차별-> 증오범죄"로 이어지는 혐오 피라미드를 무너뜨려야 한다.




책을 다 읽으니 우선적으로 법적 규제가 필요한 '혐오표현'에 대한 개념은 잡힌 것 같았다.


하지만 인터넷 공간은 특수하다. 인터넷 공간에서 사람들은 쉽게 글을 남기고 당사자는 쉽게 '혐오표현'을 발견한다. 한번 편견과 모독이 섞인 표현이 인터넷 공간에 펼쳐지면 당사자는 지속적으로 그 표현에 노출된다. 이는 실제 사회가 갖지 않는 특수성이라 생각한다. 당사자는 마음의 고통을 받으며 시간을 견디는데 물리적인 위협이 안된다고 해서 '혐오표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번 불미스러운 한 연예인의 선택으로 대두된 '혐오표현'의 잣대는 저자의 주장처럼 한정적이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인터넷 사회에서는 혐오대상을 다수자, 소수자 또는 일반인, 공인으로 나누지 않고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중하지 않는 모든 표현들을 혐오표현이라 규정하고 '혐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댓글을 고민할 수 있는 담당자로서 늦은 고민을 하는 것에 대한 후회가 있지만 이제라도 혐오가 없는 '댓글의 봄'을 만드는데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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