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허진호
응, 간다
드문 은수, 모든 상우
소화기 사용법을 아냐는 여자는 곧 라면을 끓여 낸다. 라면 봉지를 치지직 뜯고 불에 단 냄비뚜껑 손잡이를 열고 라면을 익힌다. 먹는 장면 없이 아침이 오고, 그 아침부터가 입춘이다. 봄날 시작
상우는 어리바리하다. 할머니의 치매가 치매인 줄만 안다. 치매가 젊은 할아버지를 그리는 할머니의 부침이라는 건 모른다. 운전을 한 줄 알았지 속력을 돋울 줄 모른다. 라면을 끓일 줄 알았지 그 속에 떡을 넣을지 김치로 간할지 모른다. 은수가 "오늘은 떡라면이 먹고싶어"라고 해야 떡이고, "김치도 좀 넣자"해야 김치다. 김치 떡 라면은 은수가 일러주지 않으면 일러지지 않는다. 결코. 맹라면인 상우는 떡과 김치 투하를 조종받고 '뭔'라면을 끓이는데, 벌써 어딘가 불안하다. 아 저 라면 분명 맹탕일 거다. "은수씨, 내가 라면으로 보여? 말 조심해요!" 네, 라면으로 보이네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어떻게라니요, 이렇게지요.
은수는 어리바리하지 않다. 도리어 여우냐고? 그런 세속을 갖다 붙이면 이영애의 청아가 민망하잖아. 은수는 옆에 유지태를 두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소화기 사용법을 읽을 수 있는(읽은 척 하는, 언젠가 읽었던 기억을 돌이켜내는) 여유가 있다. 결혼을 한 번 해봐서라고? 결혼 한 번에 인간이 능구렁이로 변태하나. 그냥 은수는 그런 은수다. 은수는 소리를 따러 가자고 해놓곤 그 결말을 라면과 키스로 맺어낼 수 있다. 은수는 유지태를 사랑하다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은수는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낀 평론가에게 쌍꺼풀 수술 했어요? 물을 수 있다. 그것도 cd를 면티에 밧밧 닦으며, 길길 웃으며. 은수는 봄날을 보내버릴 수 있다. 봄 맞아 핀 상우더러 갑자기 겨울로 가버리라고. 잔인한 계절형 귀양을 명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좋은 건 내게 은수는 먼 은수고 상우는 가까운 상우여서다. 은수는 닮고 싶지만 닮을 수 없는 화보집 같은 인간상이고 상우는 닮기 싫지만 똑 닮아있는 거울같은 인간. 나도 집 갈라는 상우 붙잡아 집에 가두고 라면불 올리는 여유 갖고 싶다. 라면 그 자체 말고. 그냥 그거다.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이 어제인 일상에서 라면을 끓이는 자와 라면인 자가 데우는 영화적 공기.
음악도 좋다
사실 김윤아의 노래가 언젠간 어디선간 이쯤에선 다음엔 터지겠지 기대하다가 기대만 무색하고 끝내 터지지 않았다. one fine spring day로 엔딩. 봄날은 fine하지만 겨우 one이라 ever할 수 없어서 슬픈 것 아니겠어? 어차피 라면은 시도 때도 없이 온다. 봄은? 봄도 라면 끓이다보면 오겠지 뭐. 겨울도 저만치 가면 봄 되잖아. 둘이 상극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