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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Dec 14. 2021

바람아 멈추어다오

간호일기

바람아 멈추어다오


그러나 당신은 그날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나는 어떤 무력감을 느꼈다. 뒤돌아서 가시는 그림자 뒤로 휘잉 바람 기운이 느껴졌다. 당신이 풀어내신 증상 앞에 이보다 더 신신한 당부는 없을 것이다. 살짝 무시당한 기분도 들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던가. 대상자가 듣지 않는 조언을 간호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야 하나. 마음 상처에 거즈 조각 덧댐으로 자괴한 셀프 격려.


  참 궁금하다. 그 바람, 은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전심전력 모아 모아 방패로 막아선다면 오던 풍기(風氣)를 왔던 곳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허망함이 때로 힘이 드세다.


  수술을 못하는 때잉게, 엉치뼈가 고목낭구 긁어낸 것 같았어. 으사 냥반이 나를 부르더니 이거 보라고 함시나 갈챠 주대요. 우리집 양반이 이십 년을 들어앉아서 고생 안 했는가베. 바람맞아서. 끝판에는 살이 패이고 등창이 생기고(한숨), 비닐 장판 깔아놓고 사람을 뒹굴려 감서 씼겼잖요. 뒤치다꺼리하고 나면 나도 죽겠는 거라. 열두 마지기 나락 농사에, 새끼들 건사해야지. 일이라면 아주 지긋시라. 인자 이만하면 됐다 시픈디, 내 몸이 얼병이 들어서 안 아픈 데가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지. 몸땡이는 버석버석 소리가 나는디, 입은 살아서 요래 떠드는구만요(웃음).


  돈이 없응게로. 소로 밭 갈아 지어야항게, 애들도 갈쳐야항게 결국 땅을 팔기 시작했잖요. 요새는 손자들까지 우리 할매 최고라고 옷도 사서 보내고 그라요. 보건소 약을 먹으면 나긋나긋 풀어지면서나 안 아파. 그랑게 오지, 안 나스믄 오것는가요. 그때는 세월이 그랬응게 그랬다 치지마는, 자네는 좀 서둘러 보시게. 무식해서 아는 게 없지만서도 내 생각은 그러네.


  일곱 시 좀 넘었을까나? 아침을 먹음시나 테레비 보고 있었는디, 쥔양반이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무슨 말인가를 하더라고. 그란디 영 못 알아듣겠는 거여. 여보! 갑자기 왜 이랴? 응? 한쪽 머리가 아프다 하더라고요. 화장실 가고 싶다고 일어나는디 영판 딴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요. 급히 바늘을 찾아서 손가락을 따줬어요. 피도 쪼금밖에 안 나오드만.


  목 마르고 입이 탄다고 그래서, 체했나 싶어 매실 진액을 반 컵 정도 드렸지. 종이컵을 툭 놓치더라고요. 다시 주니까 서너 모금 마시더니 트림도 하고 방으로 가더라고. 그러고는 해가 넘어가고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샜어요. 날이 밝으니까 노인일자리 나간다고 장갑을 끼는디, 한쪽 손가락이 안 벌어지는 거여. 안 움직여진다고. 추워서 그런갑다고 재우재우 옷 챙겨 입고 나갔다가 마치고 왔는디, 어제보다는 괜찮다고 하고만요.


  진료대기실에 앉아 나누는 두 분의 대화이다. 과거와 최신 병력을 넘나드는 이야기가 문턱 너머로 들려왔다. 이씨는 ‘바람 맞아’ 누워있던 남편 간호 이십 년사(史)를, 강씨는 어제 겪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어떤 일을 이야기하셨다. 나는 강씨에게 다가갔다. 소장님! 머리 아플 때 먹는 약 좀 주세요. 어제보다 괜찮응게 차차 나아질 것이라고, 진통제나 달라는 말을 무시하고 “빨리 119 부르세요. 제가 부를까요?” 결국, 큰아들과 상의해서 알아서 하겠다 하셨다. 아세트아미노펜 약봉지만 들고 나간 당신.


  뇌졸중이 어떤 질병인지 알고 계십니까? 뇌졸중이 어떤 증상을 일으키는지 알고 계십니까? 뇌졸중의 위험 인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뇌졸중의 초기 증상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까? 아래 내용에 맞는다고 생각하면 ‘예’,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니오’, 모르면 ‘모르겠다’라고 대답해주십시오. 갑자기 한쪽 얼굴, 팔, 다리에 힘이 빠진다. 갑자기 말이 어눌해지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갑자기 한쪽 눈이나 시야의 반이 보이지 않거나 물체가 두 개로 보인다. 갑자기 어지럽거나 몸의 중심을 잡기 힘들다. 갑자기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심한 두통이 생긴다.


  뇌졸중 증상이 보인다면 당신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병원에 데려간다. 한방병원에 데려간다. 구급차를 부른다. 가족에게 연락한다. 모르겠다. 당신은 누군가가 뇌졸중 증상을 보일 경우, 빨리 병원에 가서 짧은 시간 안에 응급처치 해야 하는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몇 시간 이내로 응급처치를 취해야 한다고 알고 계십니까?


  설문지가 내 앞에 놓여 있다. 지역사회 건강문제 해결을 모색하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뇌졸중 인지율 및 경험률에 관한 문항들은 며칠 전에 겪은 업무를 측정하는 바로미터(barometer)였다. 모공 속으로 얼음조각 줄기가 전율가시처럼 뻗쳐 들어가는 기분이다.


  식사 중 아내 쪽으로 몸 돌린 남편, 남편의 중얼거림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아내. 툭 놓친 컵. 장갑 앞에 벌어지지 않은 손가락. 비틀거림, 두통. 전형적인 뇌졸중 초기 증상이 아닌가. 구급차를 부르기보다 바늘 끝으로 손을 땄다는 강씨. 남편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루 지나자 소실된 듯 보인 증상들. 두통약 지어달라던 그날, 조용히 불어오는 징조 앞에 나는 왜 더 의연하게 절박하지 않았던가. 바람아! 멈추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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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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