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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이총총 Aug 07. 2019

Knowing something by heart - 2

080619 Seoul, Korea

한국의 여름이란 폭염의 아이콘으로 가끔은 싱가폴의 여름 (그렇다, 싱가폴에도 여름이 있다)보다 더 덥고 습하거나 몇 시간씩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이어지는 폭우와 숨 막히는 더위가 번갈아가며 누가 더 오래가나 버티기 게임을 하다 어느 순간 내년에 보자 하고 사라져버리는 그것이다. 


에어컨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내 국민학교 시절 여름방학을 시골 외할머니 댁에서 보내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요양병원에서 아마도 인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시는 외할머니가 50대였을 때, 그러니까 지금 우리 엄마보다도 더 젊었을 때 우리가 태어났다. 딸만 셋이라는 사실이 외가인 할머니에게도 아쉬움으로 남았던 것 같지만 첫 손주인 우리들을 할머니는 많이 예뻐하셨다. 외할아버지를 50대 초반에 갑자기 하늘나라로 보내고 홀로 남은 할머니는 대한생명 보험설계사로 쉴 틈 없이 바쁘게 사셨는데 여름방학이 되면 참새처럼 찾아오는 우리를 얼마나 극진히 대해주셨는지. 읍내에서 느릿느릿한 시골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와 정류장에서도 한참을 걸어야 할머니 집이었다. 낮에는 읍내에 있는 사무실에 나가셨던 할머니는 오후에 커다란 박스를 머리에 이고 지고 그 먼 길을 버스를 타고 또 걸어 돌아오셨다. 그 박스 안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군것질거리와 할머니의 단골 멘트 “라면 삶아줄까?” (그렇다, 라면은 삶아야 한다. 끓이는 게 아니라) 물으실 때 내밀 라면으로 가득했다. 집에 손님이 오실 때 으레 사 오던 예쁜 박스에 담긴 과자선물세트보다 할머니가 크고 투박한 박스에 하나하나 골라 담으셨던 그 과자들이 훨씬 좋았다. 


뜨거운 여름 볕을 초록의 논이 남김없이 받아들여 꽉 찬 알곡을 그 몸에 새겨나갈 때 나도 거기에 있었다. 미미나 쥬쥬가 그려진 분홍색 샌들을 신고 그 흙길을 걸었다. 외할아버지가 전쟁 후에 힘겹게 가정을 꾸렸던 그곳을, 외할머니가 사 남매를 살뜰히 키웠던 그곳을, 우리 엄마가 세라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던 그곳을.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걷다 만나는 이웃들이 “니가 진미 딸이냐?” 물으시고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안겨주시는 수박을 받아들고 돌아오면 방 한켠이 수박으로 가득 찼다. 그게 마치 외할아버지가 잘 살아오신 인생 같아 이유 없이 뿌듯했다. 


돌이켜보면 무성영화 같은 그 시골 풍경에 빠지지 않았던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매미였다. 정확히 말하면 매미소리. 지금처럼 하루 종일 티비가 나오던 시절이 아니어서 할머니도 없고 티비도 안 나오는 한여름의 낮 시간은 가끔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대청마루에 언니와 동생과 쪼르르 앉아 가만히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변하지 않는 풍경에 눈은 아득해지고 귀는 밝아졌다. 매미는 맴맴 울어 매미라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맴맴 우는 매미는 열 마리 중 두세 마리일 뿐 각자의 매미는 다른 소리를 내고 다른 리듬으로 운다. 매앰매앰 하고 2박자로 우는 매미가 있는가 하면 매——앰 하고 소리를 내지르는 4박자 온음 매미도 있다. 높낮이가 다른 음을 1.5박 대 0.5박으로 리드미컬하게 울어내는 매미가 있는가 하면 야우야우하고 우는 매미도 있다. 멍하게 매미 오케스트라를 듣고 있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골 생활이 단조롭지 않았다. 


가끔은 곤충채집을 한답시고 채집망을 들고 나설 때도 있었는데 나는 겁이 많아 내 힘으로는 콩벌레 한 마리를 겨우 잡을까 말까였다. 외삼촌이 외갓집에 와 있으면 채집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 손으로 턱하니 매미를 잡아줄 때가 있었는데 그때 본 매미는 몸통보다 반투명한 양 날개가 훨씬 길어 맴맴 하고 울 때마다 아래위로 그 날개가 움찔거렸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한창 토익시험을 많이 봤는데 그때 도입되기 시작한 수시전형에 지원하려면 점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토익 학원이 많지도 않았고 나는 지방에 살았을뿐더러 서점에 가봐도 토익 문제집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입시생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해서 가려니 열여덟의 나로서는 인생을 건 도박이었다. 수능 공부 대신 토익 시험을 본 셈이니. 지금처럼 격주로 토익 시험이 있을 시절도 아니라 겨우 한 달에 한 번, 손에 꼽을만한 기회가 있을 뿐이었다. 목표는 일단 900점이었는데 고3 1학기 때는 항상 800점 후반에서 맴돌아 애가 탔었다. 


수시 지원이 9월쯤이었나 그래서 8월 토익 점수가 나에겐 마지막 기회였는데 그 여름날 보수동 어느 중학교 교실의 공기가 기억이 난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리스닝 문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게 울어대던 그 매미 소리도. 2001년 8월 토익 시험장이 마치 수능 시험장처럼 느껴진 나에게 그 매미 소리는 너무 가혹했다. 교실 창문 옆에 심어둔 큰 나무는 여름 동안 시원한 그늘이 되었지만 매미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리딩 시간이 되자마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매미를 보며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던가. 그 달의 토익 시험은 내가 처음으로 리스닝 만점을 못 받은 통한의 실패작이었다.   


나에게 매미란 여름의 소리이다. 매미가 울기 시작하면 여름이 왔나 싶고 장맛비를 뚫고 우는 매미소리를 들으면 쟤네도 살려고 애를 쓴다 싶다. 20년이 넘게 여름이면 매미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난 이렇게 매미소리 하나에 수만 가지 추억이 떠오르는데 파리에도 싱가폴에도 뉴욕에도 매미가 없다. 파리에는 덥지만 건조해서 상쾌한 여름이 있고, 싱가폴은 일 년 내내 덥거나 더 덥고, 뉴욕에는 한국과 비슷한 여름이 있지만 어디에도 매미는 없다. 


직장인에게 휴가란 계절을 따지지 않고 언제든 갈 수 있을 때, 아니면 가야만 할 때 가는 거지만 어쩌다 보니 한국으로 올 때는 여름을 쏙 빼놓은 한겨울이나 봄 가을이었다. 올해 봄과 초여름과 지금의 한여름을 온전히 한국에서 보내며 매미소리가 오고 가는 것을 경험한다. 가끔은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그 매미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하지만 이제야 온전한 여름을 보내는 것 같아 혼자 행복해했다. 몇 주 전 이 행복감과 노스텔지아를 깨버리는 남편의 질문을 듣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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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는 뭔데 이렇게 미친 듯이 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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