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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화 Oct 14. 2016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요?

립반윙클의 신부

소라게 같은 여자가 있다. 몸집도 작고, 여리다. 내 몸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다른 생물체들과는 다르게 누군가의 껍데기였다가 버려진 주인없는 껍데기를 주워 뒤집어 쓰고 다니다가 이것조차 내 몸에 맞지 않는다 싶으면 다시 새로운 주인없는 껍데기를 찾아 다녀야 한다. 그 껍데기는 작은 몸집을 다 덮을 만큼 크고, 주변의 위협이 없을 때조차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큰 집을 이고 발을 놀려야 한다. 혹시라도 감지되는 위험이 있다 싶을 때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망 치지도 못하고 큰 껍데기에 몸을 눌린 채 위험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 밖에 할 것이 없다. 이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작게 말하기, 순종하기, 부는 바람은 그저 맞고 기다리기, 쓰러지기, 넘어지기, 울기, 혼란스러워하기. 이런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인다. 


이와이 슌지의 신작이 왔다. 러브 레터 외에도 여러 작품이 있지만 우리는 그의 대표작으로 러브 레터만 기억한다. 하얀 눈밭에서 외치는 오겡끼데스까는 얼마나 오랫동안 패러디되고 있는지 말도 못할 정도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수한 눈밭과 그 고요함을 닮은 우리네의 첫사랑은 겡끼하냐고 묻고 있는 것 같은 "오겡끼데스까?" 하는 외침에 우리네 어설프고 순수한 심장들은 심하게 흔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이와이 슌지는 곧장 러브 레터로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여리고 순수한 정서를 깨끗한 화면에 옮겨 놓은 감독의 신작이라니 은연 중에 그런 비슷한 영상이려니하니 기대를 갖고 극장에 갔다면 장담한건대 100% 후회한다.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기도 할 것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스토리 전개에 대한 친절하지 않다. 고로 사건의 연결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는 문학적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당최 알 수 없는 줄거리와 사건의 퍼즐 맞추기로 영화는 격하될 것이다.  


이와이 슌지의 시선은 철저하게 나나미의 시선과 일치되어 있다. 나나미의 세계가 이와이 슌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이다. 나나미가 겪게 되는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다른 이에게는 어려움 없는 일상이겠지만 그녀는 주어진 일상을 살아내는 것도 버겁다. 그녀의 본 모습은 매우 소극적이고, 수줍기만 할 뿐이다. 그녀가 그녀의 얘기를 할 수 있는 세상은 오로지 손바닥 안에서 펼쳐지는 sns 플래닛 밖에 없다. (심지어 플래닛은 핫한 sns 채널도 아니다) 그저 작은 동굴에 갇혀 내 얘기를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간혹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답변에 혼자가 아님을 위로 받는 정도가 그녀의 세계이다. 나나미가 그녀의 첫(?) 남편과의 만남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인터넷으로 만난 남자를 실제로 만나기로 하고, 약속한 시간을 훨씬 지나친 낯선 남자를 무작정 기다린다. 이런 때조차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약속 장소에서 가만히 기다리거나 약속에 늦은 상대가 요구하는만큼 자신의 포지션을 조금씩 바꿀 뿐이다. 그가 손을 흔들라고 하면 손을 흔들고, 그가 보기 쉬운 곳에 가 있으라고 하면 몇 발자국을 움직여 우체통 옆에 얌전히 서 있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약속에 늦은 남자에게 화를 내거나 이유를 따져묻거나 하지도 않는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가만히 있기. 


저항 할 수 없는 그녀는 자연히 삶의 중심부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다. 자기 스스로가 단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존재는 절대로 자신의 맨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에야 맨몸을 드러낼 수 있지만 사실 그런 여유는 자주 생기지 않는다. 그녀가 그녀를 숨기기에 좋은, 새로운 안식처라고 예상한 결혼 생활에서 조차도 그녀는 안전을 느끼지 못한다. 나나미의 첫(?) 남편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나미 자신이 남편을 안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안전하지 않은 존재에게 자신의 맨몸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나미는 자기가 안식처라고 생각하고 싶은 공간에서도 절대 몸을 숨길 껍데기를 벗어내지 못한다. 만일 그랬다면 해고 사실이나 청소 중에 줍게 된 의문의 귀걸이나 어느 날 집으로 찾아 온 낯선 남자의 존재로 본인의 삶을 위험한 상황에 놓이지 않게 했을 것이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혼 전후의 나나미로 설명할 수 있다. 

이혼 전 나나미가 아직도 껍데기를 벗어내지 못하고 위협적인 현실에서 숨어다니다가 치이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혼 후의 나나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무조건으로 방어적인 껍데기를 서서히 벗어내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완전한 탈피라고는 할 수 없다. 껍데기를 벗어낸 나나미는 여전히 한정된 공간 속에서 한정된 사람들하고만 교류한다. 교류하는 사람들 역시 완벽한 맨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가 sns 상에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이미지로 실제와는 다른 공간에서 또다른 일상을 만들어 놓는 것처럼 이혼 후 나나미의 일상은 다분히 인위적이다. 

이혼 후 정처없이 헤매다가 찾아들어가게 된 여관에서도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나미는 본연의 모습과는 다른 여자가 되어 버렸고,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도 나나미 자신이 아닌 타인을 연기해야 하며,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립반윙클과의 우정도 결국에는 타인이 연출한 연극의 배우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혼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껍데기를 뒤집어 쓰는데 주체적이냐 수동적이냐는 사실이다. 


여기서 이와이 슌지는 관객에게 현대 사회의 민낯을 툭 던져 준다. 

마치 크레이프 케잌처럼 여러 겹으로 레이어드 된 현대인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얼만큼의 껍데기를 가지고 살고 있느냐는 점과 그 많은 껍데기 중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나나미의 이혼에 적극적이었던 시모는 나나미가 뒤집어 쓰고 있는 껍데기를 벗겨내고 맨몸 상태의 나나미를 노출시키기 위해 일을 꾸민다. 그리고 그녀가 결혼식 때는 가짜 친척들을 동원했고, 그녀가 밝히지 않은 부모의 이혼 원인도 밝혀냈고, 조작된 현실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껍데기를 벗은 나나미의 진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나나미의 진실이었을까? 물론 나나미는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싸울 수 있었지만 당장 그녀의 눈 앞에 보이는 현실들은 사실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녀는 실제로(어떤 사정이었든지 간에) 가짜 친척들을 결혼식에 동원했고, 부모의 이혼 이유를 명백히 밝히지 않았으며, 낯선 남자와 모텔에 있으면서 샤워까지 했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진실과 거짓의 기준으로 삼은 fact, 시모가 들이미는 증거가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모가 주장하는 그 모습이 실제로 나나미의 실체인가? 영화를 본 우리는 모두 no라고 할 것이다. 때로는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들이 진실을 가리는 가림막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모순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숨겨 줄 껍데기를 다 빼앗긴 나나미는 도대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내가 생각한 답을 하자면,...... 우선 나나미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먼저. 

"나나미, 미안해. 나나미 상, 고멘나사이."


나나미는 새로운 껍떼기를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거짓으로 친인척을 연기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거나, 저택에서의 가정부로 취직을 했다거나 립방윙클의 신부가 되었다거나 하는 것들도 결국에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무대에서 역할에 맞는 연기를 했던 것처럼(나나미 스스로는 아닐지라도 결과는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이 복잡하고 다각적인 세상에서는 한 사람의 관점에서는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그것이 아니라면 진실의 여부는 미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힘이 있는 존재가 큰소리를 내며 싸우기 시작하면 힘 있는 존재의 시선이 진실이 된다. 그러나 나나미가 그녀의 천성을 버리고 목소리 큰 존재가 될 것이라고 보이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아마도 이후의 인생에서도 끊임없이 주변의 위협에 시달리며 휩쓸릴 것이고 그때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껍데기를 찾아다녀야 할 것이다. 맞는 껍데기를 찾는다고 할지라도 또다시 찾아올 위협에 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껍데기를 찾아 헤매는 마음가짐은 전보다 단단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주체적으로 껍데기를 찾아 다닐지도 모른다. 전처럼 바람을 먼저 맞고 휭~ 힘없이 날아갔다가 그 준변에 있는 아무 껍데기나 주워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라(그것이 내게 맞는지 아닌지 따질 틈도 없이) 그래도 맨 몸뚱아리가 조금은 단단해져 몇 차례 부는 사람에는 비록 상처를 입더라도 내게 맞는 껍데기를 찾아 쓸 정도의 예방 주사는 맞았다고 생각한다. 


나나미는 아직도 다른 사람들보다 수줍고, 단단하지 않다. 

마시로의 장례가 끝나고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 날의 일을 기억해보면 그녀는 아직도 맨몸을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여리다. 다른 사람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하다. 이런 여자에게 조금 더 힘을 내서 강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녀를 더욱 주눅들게 하는 위협일 수 밖에 없다. 무조건적이고 획일적인 기준을 두고 "자, 힘을 내! 화이팅!"을 외쳐주는 것처럼 의미없는 일도 없다. 

나나미는 이후에도 플래닛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플래닛에 거짓말을 잔뜩 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는 또 '오늘도 거짓말을 했네.' 하면서 후회를 할 지도, 자기처럼 또 다른 sns의 다른 유저도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은 채 그 사람과의 불안한 관계를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단지 나나미의 나약함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나미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나나미의 삶을 이렇게 길들였기 때문이다. 비단 나나미 뿐일까? 비단 나나미의 나약함이 이유일까? 나나미의 나약함은 그녀의 삶을 너무나 투명하게 보이도록 했을 뿐이지 그녀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영화 속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순수한 맨 몸뚱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나나미에게 심심한 사과를 했으니 이제 나나미를 위한 응원의 한 마디를 해야겠다. 

"나나미 상, 조금 더 뻔뻔해져도 괜찮아. 거짓말 정도는 하더라도 절대 네 삶에서 도망치지 않는다는 점이 더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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