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마브로의 변주 2. - 네비올로와 견주다.
와인의 왕과 여왕이라고 하는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를 만드는 포도종이 네비올로다.
짙은 보라색의 이 포도종은 두꺼운 껍질에서 나오는 높은 탄닌과 산을 갖는 만생종 포도로
오래 기다림 후 수확한 이 포도는 힘이 좋은 와인으로 만들어지고 필연적으로 오랜 숙성 기간을 가진다.
숙성을 거친 잘 열린 와인은 블랙체리, 감초, 아니스, 허브, 말린 장미 등의 향이 나는데
매우 안타깝게도 네비올로 종으로 만든 와인을 오롯이 맛있게 마시기란 쉽지 않다.
숙성 기간도 긴데다가 오랜 숙성 후 제 모습을 보여줄 때까지 코르크를 열고 기다리는 긴 시간을 거친 후라도
기대하는 딱 그 맛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기대가 너무 큰 이유일 수도 있고, 아직 와인의 숙성이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하필이면 내가 산 한 병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을 수도 있고 이유는 여러가지다.
그렇게 실망하기를 몇 번 하고 난 후 네비올로에 정이 떨어질 정도가 되면 깍쟁이처럼
네가 나를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하면서 날카로운 탄닌으로 찌르르 선방을 날린 뒤
얇게 레이어드 된 향들을 하나하나 풀어내며 코를 간지럽힌다.
네비올로는 이런 포도다.
열 번 마시면 예닐곱 번은 실망하기 일쑤지만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한 번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기꺼이 실패를 감내하게 하는 와인이 되는 포도다.
북부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대표 포도 품종이자 이탈리아 와인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품종이다.
이탈리아가 아닌 어디에서도 이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지 않는다.
오직 피에몬테에서만 만들며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는 네비올로 와인을 만드는 최고의 마을이다.
바롤로와 비교 시음을 할 그리스 와인이 시노마브로 100%의 와인이라니 시음 전부터 기대가 컸다.
나란히 놓인 두 잔에 비슷하게 짙은 보라빛을 내는 와인 두 가지가 따라졌다.
올 것이 왔다는 기대감.
첫 번 째 잔을 스월링, 후각 체크를 하고, 한 모금을 마시고 첫 느낌 정리.
그리고 이어 두 번 째 잔을 똑같이 스월링, 후각 체크, 한 모금 마시고 첫 느낌 정리.
싱겁게도 바롤로와 시노마브로 100%의 그리스 와인을 가려내는 건 쉬웠다.
두 와인 모두 대표적인 토착 품종 100%로 만든 와인이었지만 네비올로와 시노마브로의 개성은 너무 달랐다.
이것은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모두 훌륭한 와인이다. 그저 다른 와인이다.
둘을 비교 테이스팅 한 이유는 우월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역사로 보거나 와인의 역사로 보거나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관계를 갖는 이웃한 두 나라의 대표 품종들을 함께 마셔보는 흔치 않는 기회이기도 했고,
이탈리아와 와인과 달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 와인의 우수성을 이탈리아 와인의 대표인 바롤로와 함께
확인해 보고자 하는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결과적으로 두 와인은 모두 훌륭하고, 서로 달랐다.
현재 와인 시장을 좌우하는 국가들이 있고, 이들을 올드 월드 / 뉴 월드 각기 부르고 있긴 하지만
고대에 와인을 주로 생산하고, 수출한 나라는 그리스였다.
따라서 그들의 토착 품종을 그들의 양조 기술로 와인을 만드는 일은 계속되어 왔다.
다만
그들에게 와인 산업이란 국제적 마케팅 차원의 사업이 아닌 자신들만의 고유한 와인 취향을 고수하는 방향으로 생산, 판매하는 자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산업이었기에 국제적 트렌드에는 민감하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날 와인의 방향은 와인 그 자체로의 모습이 아닌 다양한 음식과의 조화, 적정 도수의 알콜과 밸런스 그리고 마시기 편한 스타일로 향해 가고 있고 그리스 와인의 철학은 이러한 점을 추구하고 발전시켜 왔다.
(와인 밴드 '광화문 와인'의 맹상호 님의 글을 인용함)
나의 입장에서 요즘 그리스 와인에 열중하고 있는 이유는 유명 산지의 와인이 아니라는 유니크함에 있다.
와인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성 아닌가?
다양한 품종, 다양한 산지, 다양한 양조 기술, 생산자들의 다양한 철학 이런 것들.
이런 기준에서라면 그리스나 기타 지역에 와인들로 눈이 가는 건 당연한 순서일지도 모른다.
시노마브로 100%로 만든 kir-yianni RAMNISTA.
비교 테이스팅한 바롤로와 비교한다면 훨씬 넉넉한 매력과 여유가 있는 와인이라고 하고 싶다.
바롤로를 체지방 9% 이하의 근육질의 몸이라고 한다면
람니스타는 체지방 20% 대의 글래머러스하게 보기 좋은 건강한 몸이라고나 할까?
가늘고 긴 잔근육들이 매력있게 발달했고 부드러운 지방과 조화를 이룬 밸런스.
시노마브로 100%로 만들어진 끼르야니의 람니스타는 단단한 바디와 향기로운 아로마의 밸런스가 훌륭하다
일상의 와인, 밥상 와인을 즐기는 내가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을 찾는다면
나는 두말할 필요없이 람니스타를 선택할 것이다.
둥글둥글하게 모나지 않은 산미는 와인을 전체적으로 발랄한 분위기로 이끌고 있고,
와인의 주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붉은 과일의 향미는 전체적으로 풍성한 이미지를 준다.
또한 단단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탄닌은 와인의 중심을 잡아 주는 꼿꼿한 힘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와인 한 모금을 입에 물고 있으면 과즙이 아주 풍부한 과일을 한 입 베어 문 것 같은 느낌인데
이때 아주 기분이 좋다.
입 안에 와인이 머물면서 와인의 온도가 높아지니 점차 와인 잔에서 코로 느꼈던 아로마보다
조금 더 다양한 향을 느낄 수 있고, 알콜이 주는 부드러운 감도 느끼게 된다.
확실히 잔에서 느끼는 것보다 입에 머물고 있을 때의 향이 더 풍부하다.
잘 익은 붉은 베리류의 깨끗한 과일 향과 서서히 조여오는 단단한 탄닌의 조화가 반전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네비올로와 견준 정도로 예상할 수 있듯이 시노마브로 역시 농축도가 강한 풀바디 와인으로
마시기 직전 오픈하기보다 적어도 4시간 이상은 브리딩 시켜 놓는 여유가 필수다.
미리 와인에 숨통을 틔여 놓는다고 할지라도 잔에 따른 후 충분한 시간동안 여유있게 즐겨야 한다.
자연에서 오랫동안 익고, 오랜 숙성 후에 완성된 와인이 너무 일찍 본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것처럼 매력없는 경우도 없을 듯이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래야 서서히 본 모습을 보여준다.
바롤로와 람니스타의 블라인드 테이스팅 1차에서
좋은 느낌을 받은 이후
와인 모임에서 멤버들과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했다.
구성은 똑같이 바롤로와 람니스타.
멤버들은 오직 두 종류의 와인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한다는 정보 뿐 와인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었다.
와인의 품종이나 나라를 맞추는 테이스팅이 아닌
오직 두 와인의 맛을 분석하고 비교해보자는 취지였다.
같은 시간 동안 브리딩 시켰으나 시노마브로가 조금 늦게 열렸다.
두 종의 와인을 시음한 후 멤버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잇몸이 뻣뻣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한 탄닌이지만 거칠고 투박하지 않은 것으로 둘 다 고퀄리티 와인이라고 의견을 통일했다. 이어 과일, 꽃, 향신료 등의 아로마를 주 캐릭터라 지적했으며, 조심스러운 의견으로 와인의 섬세함을 바탕으로 볼 때 뉴 월드는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이때 깜짝 놀랐다.
역시!
산미가 높다는 의견이 동일하게 나오면서 하지만 카베르네 쇼비뇽은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을 시작으로 서서히
품종으로 좁혀 들어가는 즈음에는 올드 월드는 맞으나 프랑스는 아니라는 힌트를 던졌다.
그러면 거의 답은 나온다. 산미가 높고, 카베르네 쇼비뇽이 아니고, 프랑스도 아니라면,
와인의 캐릭터 상 스페인은 자연스럽게 pass 되고 남은 건 이탈리아.
그리고 이 정도의 코퀄리티의 와인을 생산한다면 당연히 북부 피에몬테.
그런데 끼안띠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며 남은 건 네비올라.
바롤로인지 바르바레스코인지까지 맞추는 건 힘든 일이라 우선 한 종은 바롤로라 공개를 하고
둘 중 어느 것이 바롤로 같다는 질문을 했을 때 멤버들은 공히 람니스타를 바롤로라고 했다.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바롤로와 람니스타의 첫 테이스팅 자리에서도 대부분의 시음자들은 람니스타를 바롤로라고 했다.
아마도 바롤로에 대한 좋은 기억과 와인의 왕으로 이야기 되는 바롤로에 대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바롤로는 맛있게 마시면 그 이미지가 너무 강력하나 마실 때마다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쉬운 와인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강한 바디와 탄닌. 그리고 높은 산도로 딱딱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좋았던 때의 강력한 기억이 존재하므로 둘 중 어느 것이 바롤로일까하는 질문에서는
당연히 좀 더 느낌이 좋은 것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시노마브로는 바롤로보다 아로마의 과일 캐릭터가 더 강하고 바디는 조금 더 유연하고 여유롭다.
따라서 당연히 접근성이 훨씬 좋다. 즉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다.
물론 이는 모든 바롤로와 모든 시노마브로를 통계낸 결과는 아니다.
단지 두 번의 시음 결과에 한한다.
(바롤로는 람니스타와 가격대를 비슷하게 맞춰 7,8만 원 대.)
따라서 절대적인 평가와 기준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지향하는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밥상 와인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적정 가격의 바롤로와 비슷한 캐릭터의 와인으로 그리스 시노마브로 품종의 와인도 훌륭한 선택이라고 본다.
오히려 바롤로보다 취향적 호불호는 더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와인의 모든 요소가 강한 풀 바디 와인이지만 밸런스가 훌륭해 입 안에서는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과일과 꽃 향의 아로마가 기분 좋게 다가오며 산미는 와인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밝고, 가볍게 한다.
알콜은 다소 높은 편이나 와인을 마시면서는 높은 알콜을 느낄 수 없다.
입 안에서의 느낌은 가벼울지언정 향과 탄닌이 주는 촉감. 그리고 알콜의 영향으로 꽉 찬 느낌을 준달까?
굳이 어떤 와인과 비교하기 보다는 단일 존재로도 그 가치는 충분히 훌륭하다.
낯선 풍종이고, 유명 산지가 아니기 때문에 평가 절하하기에는 매우 안타까운 와인이다.
어느새 와인 러버들이 한 해의 마지막이라고 느낄 보졸레 누보의 출시일도 지나고
벌써 12월. 연말 모임으로 바쁜 시기가 왔다.
매년 듣는 지루한 말이지만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계획 할 때가 온 것이다.
어쨌든 뭔가는 해야 할 것 같은 이벤트가 폭발하는 때 와인으로 밥상을 차려보는 것을 계획한다면
시노마브로 품종의 와인을 추천한다.
시노마브로의 변주2. - 람니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