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거닐다_20150826
눈이 벌떡 떠지는 아침이었다. 부지런히 씻고 짐을 챙긴 이유는 립톤(Lipton) 팩토리에 가기 위해서이다. 여름이 시작될 때면 시원한 물을 유리컵 가득 담고 립톤의 아이스티를 두 스푼 물에 풀어 투명하게 얼린 각얼음과 마셨던 기억이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로컬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하나 둘 곧 버스에 오른다. 서로 아는 얼굴들인지 버스에 타자마자 인사를 건네며 꺄르르 웃기 바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놓인 도로 탓에 몸이 왼쪽으로 쏠렸다, 오른쪽으로 기울었다를 반복했다. 매일같이 타는 버스일 텐데도 아이들은 이 불편한 승차감을 즐거워하며 더욱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여학생들의 블라우스는 희고 깨끗했으며, 양 갈래로 머리를 곱게 땋아 내렸다. 남학생들의 교복 바지 주름은 가지런히 다림질되어 있었고, 포마드를 잔뜩 발라 단정히 머리를 넘겼다. 중간에 탄 젊은 여인이 학교 선생님이었는지 자리에 앉아있던 남학생이 잽싸게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덜컹거림이 그대로 느껴지는 길조차도 싱그러운 아침이었다.
립톤 팩토리에 내려 립톤 싯(Seat)까지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나무 대신 차밭으로 이루어진 수목원 같다. 완만한 경사로를 차 향을 맡으며 올라가다 보면 몸이 가벼워진다.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았던 일상의 피로는 걸음이 늘어날수록 옅어진다. 떼놓고 싶었던 지난날의 기억은 땅에서 멀어질수록 흐려진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걷히고 충실한 오늘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믿음이 확고해진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충만해진 채로 립톤싯에 닿았다. 때마침 립톤 팩토리의 직원들이 모여 단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오늘이 바로 립톤싯 옆에 그의 동상을 세우는 날이라고 했다. 운 좋게도 립톤 동상이 세워지고 처음 사진을 남긴 여행자가 되었다.
립톤싯 카페에서 홍차를 주문한다. 립톤 로고가 그려진 머그잔에 홍차를 담아 각설탕, 스윗과 함께 내어준다. 입안에 스윗 한 조각을 넣고는 홍차 한 모금을 마신다. 설탕을 넣지 않아 약간 쌉쌀한 홍차는 이내 스윗을 만나 목 안으로 달달하게 넘어간다. 올라오는 길에 보았던 차 밭이 그대로 펼쳐진 풍경은 왜 이곳에서 매일 립톤이 차를 마셨는지 끄덕이게 했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수증기가 커다란 구름이 되어 눈 앞을 가렸다. 하얀 연기 가운데 둘러싸여 음미하는 두 번째 모금. 차 맛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묵직한 구름 커튼이 걷히고 햇빛이 다시 비출 때 마시는 세 번째 모금, 햇살이 담긴 따뜻한 맛이었다. 입 대신 코로 천천히 들숨을 마셨다. 차 밭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한 소다수처럼 청량했다. 공기는 얼음을 넣어 차갑게 만든 아이스티처럼 달달하고 상쾌했다.
내려오는 길은 더욱 신이 났다. 끝도 없이 이어진 차 밭을 내려다보며 걷는 것은 내 눈에 담기는 풍경이 내 것이 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싱그러움이, 이 푸름이 모두 내 것인 양 만끽하고 있을 무렵, 뒤에서 누군가 인사를 건네 왔다.
"Are you from Korea?"
"Yes."라는 짤막한 대답에도 환호가 터져 나왔다. 자신의 두 딸이 한국 드라마의 열성 팬이라 한국인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딸들과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연하지요, 이 순간 나를 이렇게나 행복하게 해주는 스리랑카의 사람들이잖아요.'
나는 흔쾌히 그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버스를 타는 곳까지 앞으로 두 시간 가량 더 걸어야 한다며 차를 태워주겠다고 했다.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앞으로 두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면 나는 두 시간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얘기일 테니까. 실론의 차 밭을 천천히 걷는 기쁨은 지금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것이니까.
오직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아트래블(ARTRAVEL)' 잡지 5월호에 스리랑카 여행의 기억을 담은 원고가 실렸습니다. 그 중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아트래블 잡지를 통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