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거닐다_20150825
하퓨탈레(Haputale) 첫날, 우리를 숙소로 안내한 그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아버지였다. 그는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며 나와 남편, 그리고 숙소에서 만난 젊은 한국인 여성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조그만 현지 식당에 들러 빈대떡처럼 생긴 난과 도넛처럼 생긴 빵을 몇 개 구입했다. 그는 근처 슈퍼에서 작은 병에 담긴 술도 샀다. 그는 이미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더는 술을 사지 못하도록 그를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실은, 그는 술에 취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주정을 부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나하게 술에 취할 때면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것이 그의 술버릇이었다.
우리는 뚝뚝을 잡아타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의 집은 생각보다 허름했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 페인트칠도 없이 허술하게 지은 집 외벽이 그대로 드러났다. 거실 옆으로 자그만 방 하나와 부엌이 딸린 단출한 살림이었다. 그 흔한 TV도 없고, 문도 없이 커튼으로 방을 가렸으며, 거실에는 그의 침대와 또 다른 침대 하나, 그리고 낡은 의자 세 개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라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집으로 손님을 초대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그의 둘째 딸은 자연스럽게 요리를 시작했다. 그녀를 돕고 싶었지만,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 했다. 하긴 그녀를 돕는 것이 그녀를 더 귀찮게 하는 일 같기도 했다. 여러 명이 복작대기에는 좁은 부엌이었다. 재료를 다듬는 소리가 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소한 기름 향과 향신료 냄새가 부엌에서 거실까지 전해졌다.
그녀는 저녁을 준비하는 틈틈이 거실에 들러 그녀의 아버지를 살뜰히 챙겼다. 아버지의 바지 위에 치마처럼 생긴 론지를 덧입혀 바지를 갈아 입히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셔츠를 벗기자 가슴에 구멍이 크게 뚫려있는 내의가 드러났다. 아니, 메리야스라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우리네 아버지들이 입으시던 민소매 메리야스 말이다. 목이 늘어날 대로 늘어나고 구멍이 군데군데 뚫린 낡은 메리야스가 보였다. 그는 더는 몸을 가누지 못하겠다는 듯 침대에 누워 우리에게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돈밖에 몰라. 하지만 난 돈보다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믿어. 너희도 그걸 잊지 말아야 해. 돈은 아무것도 아니야. 돈보다는 가족이 더 중요해. 돈보다는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나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 행복한 사람이야···." 그는 여러 차례 비슷한 말을 반복하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딸이 저녁 식사를 내어 왔다. 식탁이 없는지라 침대 위에 신문지를 깔고 상을 차려야만 했다. 브로콜리 채소 볶음과 스리랑카식 커리를 미리 사온 난과 곁들인 훌륭한 상차림이었다. 같이 먹자는 우리에게 그녀는 동생이 오면 같이 먹겠다며 한사코 식사를 들지 않았다. 처음 본 우리를 위해 시간과 수고를 들여가며 차린 저녁이 고마웠다. 너무 고마워서 마음이 무거웠다. 날리는 쌀로 지은 밥이 찰밥처럼 목구멍에 박혀 넘어가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해 반찬을 삼키기 힘들었지만,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접시를 비웠다. 그녀의 어머니는 카타르 도하로 돈을 벌러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다른 자녀와 같이 지내고 있다 했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며, 술을 마셔야만 잠이 드신다고 했다. 우리에게 이 곳까지 방문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녀와 얘기하는 동안 이따금 돈보다는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의 잠꼬대가 들렸다.
식사를 마치고 집 밖을 나와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숙소를 향해 걸었다. 약속이나 한 듯 우리 셋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현지인 저녁식사에 초대받았다며 설렜던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걷는 내내 그가 했던 얘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행복하다 말했던 그였지만, 술의 힘을 빌려 누구보다 외롭다고 털어놓은 것은 아닐까. 스리랑카를 떠나 카타르에 있다는 아내와 자식이 그리워 매일 밤 술에 취해서야 겨우 잠이 드는 것은 아닐까. 헤어져 지내는 가족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유난히 말도 자주 걸고 살갑게 대했던 것은 아닐지. 그와 함께 스리랑카에 남아 있는 것들이 그가 더는 놓치고 싶지 않아하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향한 나의 오지랖이 과했든 아니든, 그가 꼭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헤진 그의 메리야스가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보다 유난히 멀게만 느껴지는 밤이었다.
오직 여행의 영감을 위한 책, '아트래블(ARTRAVEL)' 잡지 5월호에 스리랑카 여행의 기억을 담은 원고가 실렸습니다. 그 중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아트래블 잡지를 통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